이 글은 지난 6월 27-29일 서울에서 열린 ‘2017 세계한인학술대회’의 오세아니아.유럽 지역 세션에서 권기범 변호사(스트라스필드시 전 시장)가 발표한 주제로 해외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 참여와 권익 신장에 관한 것이다. 필자의 허락을 받고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 편집자 주(註)
 
최치원, 고선지부터  정율성, 윤이상 등 해외서 큰 족적
 
들어 가는 말
 
해외 한인 이민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한인사회와 한인사회 구성원이 더욱 잘 살기 위해서는 각자 거주하는 나라의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정치 참여가 한인사회 권리신장과 주류사회 ‘진입’을 위한 기본 전제이며 이를 위해  많은 한인 정치인들이  배출되는 것이 필수임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어떻게?’ 라는  질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도 피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정치’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너무나 흔하게 쓰는 ‘정치(政治 Politics)’라는 단어를 나름대로 본 주제와 연결시켜 보려한다.   
 
다음으로 인류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이주 내지는 이민에 대한 가벼운 사례별 모습을 살펴보고 한민족 출신으로 타지에서 성공한 이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 이들이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주는 메시지를 찾으려고 한다.     
 
이글의 후반은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이미 상당 부분 회자된 세계 각국에서 활약했거나 활동 중인 한인계 정치인들을 미주 사회 위주로 소개한다.    
 
마지막 부분은 보다 나은 정치참여를 위해 가져야될 자질에 대한 고민이다.  아울러 당연한 이야기에 대한 숨겨있는 아니면 무심코 지나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다.  
 
1. 너희가 정치를 알아?
흔히 누군가 특정인을 ‘정치적’이라고 하면  정치적이라고 지적된  사람에 대하여 다분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거나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불러온다.  그래서 맥쿼리사전(Macquarie Dictionary)에서 여러가지 정의 중 마지막  순서로 나온 정치에 대한 정의는 아래와 같다:-
 
‘the use of underhand… methods in obtaining power or advancement within an organization. (야비한 방법을 통해 특정 조직이나 단체에서 승진하거나 이를 장악하는… ’(1)
 
정치를 ‘보통사람’들에게 멀어지게 하는데 한 몫하는 부정적 정의이다. 그런데 ‘정치(政治)’ 라는 단어를 한자로 풀어보면 政 은 바를 正과 회초리로 치다의 의미인 등글월문(文)이 합쳐진 것으로 바르게 하기 위해 회초리로 친다는 뜻이다, 여기에 다스릴 치(治)를 더하면 정치는 부조화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한다는 뜻이다. (2)   아주 긍정적인 뜻을 내포한 단어인데 정치의 본 뜻이  많이 왜곡된것 같다. 이런 동양적 정의에 비해 서양에서의 정치(Politics)는 ‘정부에  관련된  과학 내지는 예술’ (“the art or science of political government’) 또는 ‘정치업무를 다루는 전문업이거나 행위 (‘the practice or profession of conducting political affairs’)로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된다. (3)   
 
여기에 정치를 특정 원칙내지는 규칙이라는 틀에서 정당적 또는 이념적 정의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조금 더 현대적인 해석은 데이비드 이스턴 (David Easton)이  내린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가치 대신에 사회 또는 국가적 재정 또는 재원 (national financial resource)를 대입시키면 쉽게 이해되는 해석이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여기에 막스 베버가 내린 정치의 정의 ‘국가의 영역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를 더하면 조금 더 정치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온다.  (4)
 
사전적 그리서 학술적 정치해석에 근거하여 정치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살펴보면 정치에 대한 입체감이 더해진다.  우선 주인공으로 우리가 당연시하는 정부 조직인 입법부(국회), 행정부(중앙정부 및 지자체 정부) 그리고 사법부 (대법원/헌재)가 있다.  여기에 제4 (권력)부 라고 일컫는 언론이 끼어들고 나면 좀 더 구체화되고 시민단체 및 시민사회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국민 (온나라의 시민)이 등장하면 그야말로 정치가 조그맣게 시작되어 마침내 ‘창대’해지는  것이 된다.  
 
 즉, 정치는 우리 모두에게 시시때때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자 실체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서 정치가 배제되거나 바래진 그리고 오래된 신문조각처럼 느껴질까?  아마도 세계 여러나라가 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몇년에 한번씩 투표하고 모든 일을 국회의원이나 행정부 그리고 이들이 지정하는 사법부에 맡기면 된다는 안이함에 생기는 문제인 것 같다. 
 
대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답답함을 극복하게 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2016년 11월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이다. 투표 잘못해서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며 보여준 대한민국 시민들의 행동은 ‘이것이 정치’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혁명과 버금가는 인류사에 지속적으로 회자될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촛불혁명이 우리에게 선사한 여러 선물 중에 하나는 정치가 소위 ‘직업 정치인’들과 이들만의 게임이 아니고 모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는 높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아울러 모든 삶에 정치가 스며들어 있음을 증명했다. 시민들이 광장을 접수하면서 도시 건축 및 공간에 대한 공적사용에 대한 확실함을 불러 일으켰다. 밀실 온라인에서 움크려 있던 수많은 생각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광장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는 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정치적 이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백만 이상의 청중 앞에 노래를 부를수 있는 기회는 직접참여 민주주의와 광장이 만들어낸 것이다.   
      
2. 인류의 역사 – 이주 정치의 역사 
삶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우리가 속한 사회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부분만 정치행위로 볼 수 없다. 만일 이번 한국 대선에서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 안되면 이민가겠다는 이들의 행동도 다분히 정치적인 결단이다.  
  
앞서 정치를 폭넓게 해석하고 적용함에 대하여 다소 장황하게 논의한 것은  이주의 역사와 정치를 연결시키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태어난 곳 내지는 성장한 땅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주의 선택이 없는 미성년자들은 부모나 보호자들의 선택에 의해 타의적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을 버리고 중립국을 택한다.  이명준처럼 자신의 모국을 등지고 이민을 선택하는 이들과 다르게 타의에 의해 할 수 없는 이주 등 여러 종류의 이민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성경, 특히 구약 초반부는 여러 종류의 이주인들이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겪는 ‘강제추방이민’을 시작으로 아브라함의 ‘순종이민’, 리브가의 ‘결혼이민’, 요셉의 ‘노예 이민’ 그리고 모세의 ‘입양이민’이 있고 이중 모세의 이야기는  입양된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후 동족들을 ‘집단 난민이민’으로 이끌면서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면서 절정을 이룬다. (5)
 
모하메드, 공자 그리고 부처님도 이곳 저곳에 임시 거주를 하면서 선교내지는 지혜를 전파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자치한 요셉은 어린 나이에 이복형들에 의해 이집트 상인에게 팔리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맞는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능력(해몽능력)과 우연의 연속으로 이집트 총리자리까지 올라간 요셉은 인류 역사에 (요셉이 실존했다는 전제 아래) 등장하는 첫번째 이민자 출신으로 성공한 정치인이 아닐까 추측한다. (6) 스토리가 있는 요셉 정치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자신을 쫒아냈던 형들과 부족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행복한 마무리와 아울러 이민자들에게 ‘롤모델(role model)’까지 제시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모세의 출애굽기 이야기는 입양이민으로 시작되었다. 중간에 본의 아니게 한 집단(히브리족)의 대표자가 되어 졸지에 이집트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하여 부득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게 된다.  히브리족들의 출애굽이 아니라 억압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탈출이라는 해석이 있듯이 일종의 집단적 역이민의 사례를 제공해준다.  지금의 중동및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과 흡사하다.  이들은 집단적 정치성을 띄지만 철저하게 백인계 유럽 및 미주(오세아니아 포함)에서는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악마화 되어있다. 이민자 출신 요셉의 성공스토리와는 달리 상반된 위치에 몰려있는 이들과 현실과  모세가 이끈 노예들의 대탈출과 이상하게 겹치는 느낌이 있다.  단, 모세가 이끈 노예들은 오랜 고생 끝에 가나안에 들어간다.(7)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위치를 전체를 위하여 과감하게 던진 사례를 보여준다.   
 
 
3. 역사속의  한류 스타들
가까이 보면 조선 말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주 내지는 이민이 자주 등장한다.  이전에도 물론 있었다.  스케일에서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이민자들과 비교는 안되지만 옛날부터 중국으로 발걸음을 한 이들이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하게 기록에 남은 우리 민족의 초창기 한류 스타들을 살펴보자.  
 
먼저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12세때 (868년)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을 위한 이주를 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유학가는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협박’이 통했던지 또는 본인의 노력이었던지 유학생활 6년만에 ‘빈공과거 (당나라에서 외국유학생들 대상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신라 중기 및 말기에는 많은 수의 유학생들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것 같다.  예로, 840년 (문성왕 2년) 당나라 유학생 105명이 유학만료가 되어 귀국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당나라 후 5대에 걸친 빈공과에 합격한 이는 90명이었는데 그중 80명 정도가 신라 유학생들이었다. 나머지 10명 은 발해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7)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높은 관직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876년, 유학간지 8년 만에  선주의 표수현위(일종의 지방 치안 담당관리)자리에  임명받고 잠깐 근무했다. 881년에는  소금장수 황소가 일으킨  반란 토벌책임자  고변을 도왔다.  이때  반란 수장 황소를 질타하는 ‘토황소격문’으로 일약 당나라 내에서 유명 문필가이자  스타로 떠올랐다. 이 격문은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유명해졌다(8)    이후 별다른 활약없이 29살때 (884년) 귀국하면서 선상에서 지은 시 ‘범해’의 일부를 2013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인용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라로 돌아와서 육두품으로 오를수 있는 최고직인 아찬에 오르나 본인이 추진하는 여러 개혁정책이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초야에 묻혀 은둔하면서 신라 정계에서 은퇴했다. (9)
 
주변 강대국의 본진에 들어가서 최첨단 학문내지는 기술을 전수받아야 하는 주변국 유학생의 전형적 모습을 최치원의 이민/유학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에 무장한 퇴계 이황에게 ‘부처에게 아첨했던 사람’으로 치부 되었고 ‘사대모화 (事大慕華)의 화신’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에게 낙인 찍혔지만 (10) 수려한 문체로 많은 당나라인들을 사로잡았던 최초의 중국내 한류스타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런 최치원도 결국은 당나라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신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라에서도 큰 빛을 못 보고 사라졌던 여기서도 저기서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 사례였다.   
 
 최치원이 돌아갈 나라가 있었다면 고선지는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의 자녀였다. 아버지는 고구려말기 장군 출신인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국의 서북부 끝인 하서 (지금 무위)로 끌려 갔다.  고비 사막 그리고 몽고와 마주한 중국의 서북부 끝지역인 하서 출신인 고선지는  아버지와 함께 안서로 이주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고선지가 20살 나이에 장군이 된 서기 8세기는 이슬람권과 당나라의 대결이 한창일 때였다.  서아시아를 장악한 이슬람권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동아시아를 제패한 당나라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트와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이 이슬람권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대항하는 상황이었다. (11) 
 
741년 고선지는 중앙아시아 소국인 달해부 상대로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첫 단독전투를 치루었다. 완승을 거둔 고선지는 당현종으로부터 안서도호부 겸 안서 4진의 도지병마사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현 티베트 지역에 위치한 당시 중앙아시아의 강국인 토번을 정복하라는 현종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고선지는 승승장구하면서 747년 안서4진의 총책인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면서 2만4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의 책임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권및 티베트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이슬람과 티베트와 동맹을  맺은 70여 나라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2)   
 
고선지가 치른 여러 전투 중 747년 티베트편에 선 소발율국과 치른 전투는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는 작전과 비유된다.  물살센 파륵천 급류와 백설과 빙하로 덮힌 탄구령을 수만명의 군사를 전격 이동시키면서 상대를 제압했다. 이렇게 기세등등했던 고선지도 755년 안녹산 반란 진압 실패에 관련하여 누명을 쓰고 부하의 모함으로 현종의 지시로 일거에 제거되면서 생을 마친다.  (13) 
 
고선지라는 이름은 잊을만 하면 등장한다. 2010년에는 한중 합작 드라마 ‘양귀비 비사’에도 고선지가 등장했다. 멸망한 고구려와 고구려와 함께 사라진 대륙의 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의하여 때로는 고선지가 고구려 부흥의 꿈을 꾸었을 것이라는 억측을 가지고 고선지를 대륙진출 로맨스에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당현종의 지휘 아래 있던 당나라 장군이었다.  당나라 패권주의  확장을 위해 노력한 당나라 장수일 뿐이다.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자신의 처형과 마지막을 순수히 받아들일정도로 당나라에 완전히 동화된 고선지였다. 돌아갈 곳 없는 유민의 유일한 선택을 우리는 어쩌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이유 하나로 우리만의 환상을 고선지를 통해 키웠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한민족피가 흐르거나 연관이 있으면  우리민족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인종 또는 민족주의’의 유혹은 떨치기 힘들다.    
 
근현대로 오면,  일제 때 중국에서 활동한 무정 장군, 중국 인민해방군가 작곡으로 중국 영웅이 된 정율성 그리고 통영이 낳은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등이 이국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보다 자신들이 활동했던 나라에서 인정을 더 확실하게 받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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