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진

지난 수요일(15일) 오후 2시 30분. 병원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휴대전화를 사용해온지 20여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생경스러운 소리다. 혹시 옆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하여 황급히 전화를 들여다봤다. 
“긴급재난문자 {기상청} 11-15 14:29 경북 포항시 북구 북쪽 6Km 지역 규모 5.5 지진발생 / 여진 등 안전에 주의바랍니다.” 
물론 여기는 한국이다. 당시 서울의 북쪽 소도시에 있었던 나는 별로 큰 진동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작년 9월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경주에 지진 나던 그 다음 날이었는데, 이번에는 돌아갈 때 되니까 지진이 일어났다. 난 지진아인가?

2. 엄마

한국에 온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다. 많이 아프시다. 어머니…? 아니 엄마라고 부른 것이 더 낫겠다. 철든 후 남 보기 점잖게 어머니라 부를 때가 있었지만, 다시 엄마로 부르는 것이 맞다. 난 세상에 보여 지기 전에 엄마 안에 있었고, 태어나서는 엄마가 날 업고 다녔다. 
내 인생의 최초 기억은 엄마에게 업혀 방 창문으로 내다 본 미군 병사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총을 메고 부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지금은 학교가 된 미아리삼거리의 그 자리인데, 아버지는 그 부대에 바로 붙어 있는 땅에 사업장을 지으셨고 우리 집은 그 안에 있었다. 무에서 시작하신 아버지의 사업은 가정과 일의 경계를 지을 수 없이 바빴다. 엄마는 그에 맞춰 일인삼역을 해야 했다. 매일 아침이면 미아리 고개까지 걸어가 뭔가를 해 와야 했고, 공장 마당에다가 수백포기 배추를 쌓아 놓고 김장을 해야 했는데 그녀의 등에는 항상 내가 업혀 있었다. 그렇다고 특출한 건강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당시 엄마의 한쪽 허벅지에는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맞은 폭탄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제거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때이니 적어도 10여년 이상 그러고 사셨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지금 한쪽 다리가 더 많이 아픈 것은 그 파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 아니냐고. 그렇게 구십 세 되도록 험난한 격변기를 살아온 엄마, 이젠 내 팔과 허리에 매달려 있다. 손을 잡아주고 허리로 안아 올려 드려야 이동이 가능하다. 침대로, 거실로, 화장실로, 병원으로. 그러나 이제 나는 다시 가야한다. 잠시 동안의 돌봄이 끝나고, 이 글이 읽혀지는 금요일(17일) 저녁쯤에는 난 이미 태평양 위 어딘가를 날고 있을 것이다

3. 안전

난 요새 이러면서 산다. 내 손과 허리를 사용하여 부모님을, 가족들을, 그리고 교인들을 잡아 주며 산다. 이 일을 오래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한다. 그러나 얼마를 더 가겠는가? 어렸을 적 엄마에게 업히듯이, 누군가에게 업혀 살 때가 다시 온다. 그게 인생이다. 
그래서 미래가 불안한가를 자문하며 다시 지진 현장으로 돌아간다. 한국은 오랫동안 지진 안전지역임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경주에 이어 포항, 그리고 한국 전체가 흔들거리고 있다. 세계 지도를 펴고 보라. 십여 개의 지각 판 경계에서 자주 지진이 터지기는 하지만, 판 중심부라 해서 안전하지는 않다. 누적되었던 땅의 스트레스가 임계치에 도달하는 순간 그 동안 안전하다고 안심하던 곳이 터지고 갈라진다. 

우리네 인생 역시 그렇다. 100년 동안 모든 재앙을 교묘하게 피해 다녔다해도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무한 공포의 원조인 죽음을 만난다. 그 곳이 인생의 끝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오늘을 살아보라. 그러다가 쓰러지면 하나님이 당신을 붙들어 주신다. 강한 무쇠 팔로 내 손을 잡아 주시고, 든든한 허리로 엄마를 일으켜 세워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 그 하나님이 왜 당신이라고 외면하시겠는가? 왜 당신을 붙잡아 일으켜 주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을 믿으라. 그 순간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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