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교계는 ‘명성교회의 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원만해선 교회 내부사정을 기사로 안다루던 일반 언론까지 나서 떠드는 분위기니 심상치 않다. 그 이유는 명성교회가 한국 최대장로교회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이제는 한국개신교회를 포함한 기성종교에 대하여 일말의 경외심도 잃어버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탓일 것이다. 
타이밍까지 최악이다. 정부가 바뀌고 사회 전반에서 적폐청산 요구가 커지는 상황에서, 개신교의 이런 적폐를 그냥 넘길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해이다.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본질을 잃어버린 당시의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에서 생겨난 개신교가 얼마나 자기 뿌리에서 멀어졌는지… 내부자들은 분노하고 외부자들은 비웃는다.

그러나 나는 아프다. 난 원래부터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좋아하지도, 그 교회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에도 많았던 교회안의 세습 추문과 뭐가 다를까? 그래도 그때보다 더 아프다.
내가 아픈 이유는 그래도 명성교회가 속한 교단이 다른 개신교단보다 더 상식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속한 통합측 장로교단은 이미 세습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서,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적이 있었었다. 더구나 이번 세습의 직접적인 관련자들도 계속해서 세습을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왔고, 이럴 때마다 나는 한국대형교회에서도 양식이 살아있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들의 존재는 내가 기성교회를 포기하지 않아야 할, 한국교회가 지나온 과거를 옹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어 있던 모양이다. 

내가 아픈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모습이 우리교회의 일반 모습,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단점이 훤히 까발려진 느낌이다. 원칙을 정해놓고도, ‘상황과 필요’를 이유로 원칙을 언제든지 버린다. 그럴만한 이유가 왜 없으랴? 명성교회같이 큰 조직은 특별한 카리스마적 리더쉽이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더구나 그 리더쉽에 익숙해진 10만명을 계속 하나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쉽게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그것을 이어가는 명목으로 리더쉽을 행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은 무엇의 합리성이란 말인가? 교회의 조직과 크기를 유지하는 데는 합리적인 결정일진 몰라도, 명성교회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본질을 설명하는 ‘합리성’은 아니다. 그 본질이란 바로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교회의 목적은 교회 자신이 아니라 부패와 절망에 썩어가는 세상을 향해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말은 교회가 ‘교회의 덩치와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르쳐온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외형보다는 본질을, 자랑보다는 회개를, 권력보다는 섬김 말이다. 교회 자신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둘러싼 세상이 목적이라면, 특히 이 세상이 권력오용과 외형중심의 허영 속에서 고달퍼하는 경쟁사회라면 교회는 그것을 따라가기 보다는 대안을 보여주기 위해 고민이라도 해야 한다. 이를 향해 가는 길이 교회가 좀 작아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슬픈 것은 이 사건의 결과일 것 같다. 아무리 우리가 떠들어도 이들 대형교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에 대한 요한계시록 메시지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덕분에 실제로 세상의 핍박에 대항할 힘이 없는 작은 교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명성교회를 비판하는 쪽도, 명성교회를 옹호하는 쪽도 잊지 않아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다.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가 권력과 재산, 기득권에 빠져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 이 본질을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재발견한 이들의 몸부림이 있었고, 이 몸부림이 쌓이고 쌓였을 때, 역사의 한 시점에서 다른 사건들과 만나 지금 우리가 아는종교개혁이란 사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버릴 때마다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는다. 우리가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그런 압력도 늘어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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