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랫만에 보리 이삭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입산하고 나서 처음이니 50년을 훌쩍 넘겼다. 지난 해에 4번지 뒤편 작은 화단에 보리싹 비슷한 것이 보여서 뽑지 않고 그냥 두었더니 통통한 보리 이삭이 긴 수염을 이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난 무척 반가워서 그 곳을 지날 때 마다 한참동안 그들을 내려다 보곤하였다. 몇 개의 이삭이 익을 무렵, 그 씨앗을 심은 사람은 꽃꽂이를 좋아한다는 워홀러 여학생이었다. 

그 천하던 겉 보리가 꽃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씨앗을 받아 두었다가 올 봄에 뿌리고 자주 물을 주었더니 올해는 토실토실한 이삭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장독대 곁에 있는 도라지 밭 한 켠에 심어둔 관계로 최소 하루 6번은 그들과 만난다. 그곳이 바로 공양방출 입구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난 어느새 어릴 때로 돌아간다. 생각은 어느 곳에 숨어있다가 순식간에 그렇게도 멀고 오랜 시공을 훌쩍 뛰어 넘는 재주를 부릴까? 고추 잠자리가 지붕 추녀 근처에서 몇 마리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곧 이어 보리 타작이 시작된다. 보리는 가장 더운 날에 도리깨질을 해야 낱알이 잘 떨어지기 때문에 그날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가 없다. 

땡볕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마주보고 보리타작을 하면 나는 보리단을 꺼내고 새로 일렬로 놓아 주면서 단을 동여 맨 짚을 재빨리 끊어야 한다. 보리 막걸리를 거나하게 한 두 어른은 도래깨질을 하면서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며 도리깨를 후려친다. 이런 일은 꼭 토요일이나 일요일, 내가 시내에서 올라오는 날에 맞춰서 하다보니 게으름뱅이로 이름난 나에겐 제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에 보리 까끄래기(짤라진 보리 수염)가 붙어 놓으면 따갑기가 그지 없다. 그러나 해그늘 지기 전에 빨리 털어야 된다며 두 어른의 도리깨 몸 놀림은 계속 이어졌다. 땀을 콩죽같이 흐르다 보니 두 분이 막걸리를 마실 때가 나에겐 반가운 휴식 시간이었다. 

난 도저히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뒷 밭 보리밭 고랑을 살살 지나서 와룡산으로 향했다. 그 산은 우리 면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큰 소나무가 즐비한 곳이었다. 특히 그 산 정상 근처엔 호랑이 굴이 있었다. 그 곳은 바위가 깊게 뚫린 곳으로 옛날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았다는 곳이었다. 희한하게도 그 굴 앞 반석엔 큰 황소 발자국만한 호랑이 발자국 서너 개가 선명하게 박혀 있어서 호랑이 굴로 이름지어진 듯 하였다. 
그 한 여름에 높은 산 바위굴에 들어가니 그 시원함이란 문자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난 그 곳에 들어앉아 두 어른이 날 찾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야단맞을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좀 찝찝해도 우선은 일 안하고 시원하니 그저 좋을 뿐이었다. 난 나대로 꾀를 내어 최대한 늦게 집에 가야 아버지와 마주 치지 않을 계산을 하고 컴컴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주무시는 시간에 가서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는 내일 새볔 일찍 시내로 가버리면 된다는 나름대로의 속셈이었다. 

그렇게 마주하기 싫었던 보리싹을 만리나 떨어진 이 곳 호주에서 오랫만에 만나게 되다니... 보리는 그러한 타작도 문제였지만 보리밥은 또 어떠했던가? 큰 솥에 쌀 한주먹을 넣어 밥을 해서 밥을 뜰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상에 쌀을 좀 섞어 뜨고 나면 우린 그야말로 꽁보리밥이다. 그나마 따뜻할 땐 된장국에 쓱쓱 비벼 막으면 먹을만 하다. 그러나 넓적한 도시락에 감자 두어 개와 고추장을 함께 넣어서 학교에 가서 점심 때에 열어 보면 과연 볼만하다. 물컹한 보리밥과 고추장이 뒤범벅이 되어 보기만 해도 밥 맛이 떨어진다. 그래도 그 도시락은 깔끔하게 비워지게 마련이다. 

지난 해 10월에 서울에 들어가서 옛 지인들과 함께 꽁보리밥 식당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요즘은 모두가 영양가를 따지게 마련이라 변종 꽁보리밥이었다. 현미와 콩 등을 함께 섞어서 지은 밥에다 반찬 또한 제 짝이 아니었다. 잘한다고 반찬도 많고 조미료도 이것저것 넣어서 도리어 순수한 맛을 잃어 버렸다. 주인은 옛날처럼 그렇게 하면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긴 모든 것이 변화해서 성현도 그 시대에 순응해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차려 주는대로 먹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꽁보리밥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더운 날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물동이로 샘가에 가서 갓 길어온 시원한 물에다 식은 콩보리밥을 꾹꾹 말아서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서 먹는 것이고 두번째는 점심을 굶은 채로 6 시간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서 서까래 끝 대소쿠리에 달아둔 꽁보리밥을 그냥 손으로 집어 먹던 그 맛이야 말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최고 일미였다. 그러니 형편대로 그 때에 맞춰서 자연식을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디 음식뿐이랴? 현대적 삶에 있어서도 우린 끊임없이 맛있는 것과 행복 추구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 속담은 모든 생명에겐 그 만큼 먹거리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곳에 와서 식당에 갈 때면 제일 큰 걱정이 주문하는 것이다. 메뉴판을 보면 종류도 많지만 넣고 빼는 것도 다양해서 말이 서툰 이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어가 좀 되는 사람들과 동반하게 된다. 

꽁보리밥을 먹었을 땐 그 때 식대로 살고 지금은 지금 형편대로 따라가면 된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 자신들에겐 나의 모든 과거가 쌓아올린 최상의 결과물이다. 그 모습이나 내용이 어떠하던간에 나름대로는 고뇌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나의 모든 것들인 것이다. 그래서 꽁보리밥을 먹으며 보리 타작을 할 때를 한탄할 일도 아니며 4차원 세계를 희론하면서 걱정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를 살펴볼 일만 남은 것이다. 
가뭄이 계속되는 초여름의 시드니, 도서실 유리창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밝은 햇살은 따뜻한 온기와 함께 책상 위에 내려쬔다. 창 밖으로 보이는 복지원 지붕위엔 청천에 몇 점의 백운이 한가롭게 떠돈다. 불현듯 옛 선사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뭣 땜에 삭발하고 산중에서 지내는가? (山中何所以)
산 넘어 떠다니는 백운들을 보게나 (嶺上多白雲)
그 한가로움 본인들만 느낄 뿐 (只可自怡悅)
그대에게 설명해 주지 못함 아쉬울 뿐이라네 (不堪持贈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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