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순서]
1) 1920년 신한촌 참변
2) 1920년 경신년 대참안
3) 1921년 자유시 참변
4) 1923년 관동 대지진
5) 1937년 러시아 강제이주
6) 1992년 LA 폭동

만주와 한국
한국 동포들의 만주로 본격적 인구이동은 1636년 병자호란부터로 보아야 한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군신관계를 맺는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삼학사 등 많은 포로가 끌려간다. 

이 때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여성의 수가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천만 정도였다. 후에 청나라에 평균 200량 정도의 몸 값을 지불하고 풀려 나온 여성들이 귀국한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에게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절을 잃었다고 고향과 가문에서 냉대하고 축출한다. 그들은 전쟁 포로로 끌려가 성폭력을 당하는 순간 한번 죽고 사회적인 편견으로 버림받아 두 번 죽임을 당한다. 환향녀라는 말은 나중에 ‘서방질을 하는 계집’이란 뜻의 ‘화냥년’으로 바뀐다.

만주로 한민족의 이민 역사는 1811년 홍경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이 처벌을 피해 당시 청나라였던 만주로 도망간 수 천명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내에서 관군에게 잡힌 3천 명 중 2천 명은 즉시 처형되고 나머지 천 명도 처벌을 받았으나 두만강을 건너 도망간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이후에도 1860년대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사화를 피해간 사람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러 간 사람들로 수 백만명이 만주지역으로 갔다. 거의가 불법 월강으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간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공식 이민은 1903년에 시작된 하와이 사탕수수 밭 노동자로 이민 간 사람들이다. 1970년대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서양 국가로 대거 이민 붐이 불면서 지금은 해외동포 수가 800만명을 헤아리고 있다. 

해외동포사회의 대표적 비극들은 지난 100년 동안에 주로 일어났다. 이 중 셋은 일본이, 둘은 러시아가, 하나는 미국이 가해 국가들이었다. 그 중 6개를 골라 여기에 연재한다.

1. 신한촌(新韓村) 참변
러시아 붉은 군대가 일본군을 공격할 때, 독립군이 같이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괴멸시킨다. 그 보복으로 1920년 4월 5일 일본군이 신한촌을 습격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여 이튿날 아침에 큰 마당과 거리에 시체가 산 같이 쌓이고,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

한민 학교와 주요 건물에 벤진을 부어 불지르고 체포한 한인유지와 청년을 다 처형한다. 신한촌 뿐 아니라 연해주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 검거사태가 이어지면서 이 지역 조선인사회 지도자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이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일본은 헌병을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신한 촌을 무력으로 통제했다. 러일전쟁(1904)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 조치인 을사늑약(1905), 한일합방(1910)으로 조선인들의 러시아로의 이주규모는 더 커졌다. 이동휘, 홍범도 등 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정치적으로 망명을 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가 건설되고, 1873년 블라디보스톡 바닷가에 형성된 한인정착촌인 구개척리는 항일운동가들의 활동기지로서 역할을 해나갔다. 구개척리에서는 홍범도, 유인석, 이범윤 등의 항일무장운동가들이 활동하고, 해조신문, 대동공보 등의 한인신문들이 발행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항일운동과 항일인사들의 탄압에 앞장섰던 일본영사관이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 당국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한인들의 항일활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연해주당국은 콜레라 창궐을 근거로 구개척리를 폐쇄했다. 이에 따라 1911년 중엽 블라디보스톡의 북서쪽 아무르만 연안 산기슭에 신한촌이 건설되었다. 한인들은 통나무식과 석조식 형태로 약 200여동의 러시아식 주택을 지었다.

신한촌 내에서는 최재형, 김진, 김하구, 김학준, 이상설, 윤해, 이종호, 황공도 등 주요 항일인사들이 참여했던 권업회(1911년 12월 설립)가 있었으며, 마을 중심에는 한민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밖에도 카잔 교사양성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4월에 사제가 되어 신한촌의 인노겐티 교회-학교의 교사로 활동한 오 바실리 사제와 포크로프카 블라디보스톡 교회와 황제항구 교회에서 사제로 활동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출신의 박 페도르 같은 사제들도 활동했다. 신한촌은 강제이주 전까지 극동지역의 항일 운동과 한인사회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나갔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압력은 가중되었다. 운테르베르게르 군사령관지사는 일제의 외교적 압력으로 이범윤 등 7명의 항일투사들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했다가 1911년 5월 재입국을 허락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이 발발하고 볼쉐비키 붉은군대와 반볼쉐비키 백위파 및 외국간섭군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초 일본은 러시아 내의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군함을 상륙시켰다.

일본은 레닌의 볼쉐비키를 상대로 싸우는 반볼쉐비키 백위파 군대를 지원하며, 극동지역 점령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이때 만주, 러시아 및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빨치산들은 러시아빨치산 부대들과 연합하여 일본 및 백위파 군대들을 상대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3월 5일 하바로프스크 북동부의 니콜라예프스크 항구(니항)에서 한인이 포함된 러시아빨치산 부대에 의해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일본군대의 보복행위로 이어졌다. 1920년 4월 4일 야간을 틈탄 일본군들은 블라디보스톡,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지에서 극동공화국 부대를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5시, 일본군은 연이어 신한촌을 급습했다. 일본군들은 미리 작성된 명부를 들고 한인스파이들의 도움을 받아 한인들과, 심지어 신한촌을 수비하고 있던 50여명의 러시아인 군인들까지 체포했다.

한인들은 체포당하며 “우리들은 러시아 시민들이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체포할 권리가 없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이 지방은 일본 것이다. 우리가 너희들과 러시아 사람들을 체포해 가는 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고 비웃었다.

한인 28학교는 완전히 불에 탔으며, 학교 내에 있던 <한인신보> 신문인쇄소가 전소되었고, 이때 건물 내에 있던 사람들도 산채로 불에 타죽었다. 만행은 아침 8시까지 계속되었다. 한인 가게들이 약탈을 당했으며,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들이 수색과 심문과정에서 무자비하게 구타당했거나 살해당했다.

일본군들은 도주하는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으며, 심지어는 건물에 가두어 넣고 불에 태워 죽였다. 오후 4시, 1차 수색에서 만족하지 못한 일본군들은 다시 돌아왔다. 일본군들은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한인들을 후려치며 항일인사들의 소재를 알아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튿날 4월 6일 일본군들은 더 많은 한인 스파이들을 앞세워서 다시 신한촌에 들이 닥쳐서 수색과 색출활동을 계속했다. 신한촌은 아비규환 속에서 피바다가 되었다. 동방대학생 박 모이세이와 연해주 관구법원 서기 차 콘스탄틴을 포함, 일본군의 학살작전으로 부상당하거나 희생된 자는 수백명이 넘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사회의 명망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그 일행들도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1922년 일본군은 외국간섭군 중에서 제일 늦게 연해주를 빠져나갔다. 한인들은 내전기를 거치며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국적을 부여받고 소비에트 시민이 되었다. 한인들은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에 적응해야 했으며, 기존의 농업방식은 사회주의적인 농업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대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부유농들은 토지를 반납해야 했으며, 모든 경작토지는 콜호스란 집단농장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인들은 소비에트 체제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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