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마다 열리는 유대인들의 기념일 중 하나인 욤 하쇼아가 어제 St. Ive에 있는 Massada College에서 열렸다. 욤 하쇼아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나치에 의해 죽어간 6백만명의 무고한 유대인의 생명을 애도하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념 하는 날이다. 다른 말로 ‘홀로코스트’ 기념일이라고도 불리고 ‘번제물’이란 뜻을 가졌다. 홀로코스트는 1986년 ‘밤’ 이라는 책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엘리위젤에 의해 쓰이기 시작 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났으니 73년째 되는 해이다. 행사가 열린 마사다 칼리지는 시드니 북부에 위치한 유일한 유대인 사립 학교로 대학 진학률과 오랜 역사로 명성이 높다. 행사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리 참석 한다는 것을 알려야 하고 정문을 지키는 안전 요원은 들어가는 각 사람에게 여러 질문을 해서 신분을 꼼꼼히 확인 하고야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다. 이들에게 늘 테러와 협박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위안부의 고통과 일본의 비 인륜적인 악랄함을 알리기 위해 강연회를 열 듯 이날의 행사에 나이든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소개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시에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부 유럽의 수용소를 거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미 많은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들도 대부분 80-90세의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노인들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38년에 태어 났다고 하는 한 간증자는 강연을 시작하며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라며 사진을 소개 했다. 그 안에는 호주에 살고 있는 두 딸과 세 명의 손 자녀, 그리고 가족들의 화목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4살이 된 1942년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살려고 애를 썼지만, 동네에 사는 이웃의 제보로 독일군에게 온 가족이 잡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그의 유아 시절의 행복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눈 앞에서 아버지와 엄마가 고문을 당하고 아버지의 등에 검붉은 피로 물든 상처를 보며 받은 충격에 침착함을 잃지 않은 엄마의 품과 손길은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그는 그 때 엄마는 차분하고 침착 했다고 반복해서 자신의 엄마를 회상 했다. 

추운 1942년 겨울, 그들은 동물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실려 7-8일을 지나 수용소로 이송 되었다. 기차 안에는 약간의 음식과 물과 용변을 볼 수 있는 그릇 몇 개를 제외 하고 다른 시설은 제공 되지 않았다. 수용소에 도착 한 후 엄마와 함께 수용소에 배정된 이후 3주가 지날 때까지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추운 겨울 밤에 찾아 온 아버지는 팔을 벌리고 자신을 안아주고 얼굴에 키스를 하며 따뜻이 반겨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슬픈 눈동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기억이고 나중에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독일군의 총에 사살 되었다고 전해 듣게 되었다. 

1945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하며, 그들은 풀려나고 비싼 돈을 빌려 먼저 와있던 이모의 가족을 통해 호주에 도착 하게 되었다. 돈을 갚기 위해 엄마는 세가지 일을 하며 자신을 키웠다고 기억한다. 늘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하라고 가르친 그 엄마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멘토 라며 엄마를 회상 했다. 늘 외로움과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수용소에서, 의지 할 곳 없는 호주에서 외롭게 살아 남아야 하는 처절한 삶 속에 늘 차분하고 침착한 엄마만이 그의 위안처가 되었으리라. 그는 호주에서 성공적인 사업으로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에 “저는 운이 좋은 사람 입니다. 저는 아직도 살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에 있는 나의 가족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며 말을 마쳤다. 
화면에는 그가 강연을 시작하며 보여준 딸과 사위들과 손자 손녀의 밝은 얼굴이, 그리고 가족들 틈에 미소 짓는 평생 아픈 기억을 가슴에 담고 살아온 한 인생의 모습이 담겼다. 그의 미소는 25시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이는 주인공(안토니 퀸)의 미소를 기억나게 한다. 누명과 수용소와 법정을 거쳐야 했던 숱한 고난의 시간을 지낸 한 인생이, 가족을 만나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짓는 그 미소에는 아직도 숨길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잔재가 묻어 있었다. 한 줌의 재로 변해 죽어간 무고한 6백만의 생명은 억울한 세상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살아 남은 한 인생의 미소에는 죽은 동족에 대한 미안함과 인생을 회고하는 아픈 상처가 끊임없이 묻어 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유대인을 장자 삼은 신은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잠잠하다.  창조주가 보장하는 부활의 약속이 없다면 인생은 그저 불공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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