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호주에서, 어쩌면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판례가 나왔다. 뉴캐슬지법의 로버트 스톤 치안판사(Magistrate Robert Stone)는 호주 가톨릭교회의 최고위 성직자 중 한 명인 필립 윌슨 애들레이드 대주교(Archbishop Philip Wilson, 67)가 70년대 동료 사제의 아동성범죄 행위를 은폐(cover-ups)한 혐의에 대해 유죄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유사한 은폐 혐의에 대한 유죄 처벌의 기준(판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급 효과가 매우 커질 수 있다. 그러기에 벌써부터 ‘기념비적인 판례(landmark case)'로 불린다. 아동성범죄의 피해를 극복한 한 생존자는 “호주 형사법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의미를 평가했다.  

호주 법조계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계 안에서 성직자의 성범죄를 은폐한 의혹이 수백 건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tip of the iceberg)’이며 유사한 소송이 봇물을 이룰 것이란 성급한 예측도 나온다. 

6월 19일 형량 재판(sentencing hearing)이 열리는데 윌슨 대주교는 최악의 경우 2년형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검찰은 피고의 알츠하이머 증세를 감안해 보호관찰(custodial sentence) 처벌을 요청했다. 피고측에서 항소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아마도 대법원(상소)까지 갈 수도 있다. 

윌슨 대주교는 아동성범죄 은폐 혐의로 기소된 전 세계에서 최고위 성직자가 됐는데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대주교 직책에서 사퇴하지는 않았다. 25일부터 일시적으로 업무를 중단(stand aside)하겠다고 발표했다. 가톨릭 교인들을 포함한 많은 호주 국민들이 충격과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윌슨 대주교의 혐의는 1970년대 중반 NSW의 헌터 지역 본당에서 보좌 신부였을 때, 짐 플레쳐(Jim Fletcher) 본당 신부의 아동성범죄 행위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채 묵살(은폐)한 것이다. 당시 15세 소년으로부터 플레쳐 신부에게 성범죄를 당했다는 말을 직접 들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숨겼다. 교회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호한 플레쳐 신부는 아동성범죄자(paedophile)였고 결국 2004년 기소돼 2006년 교도소 수감 중 사망했다. 

윌슨 대주교의 변호인단은 4번씩이나 이 재판이 진행되지 않도록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소송 사례가 안 된다는 주장은 지법 판사로부터 기각됐다. 지난해 시드니 항소법원에 혐의가 없다는 주장을 했지만 고법 판사가 기각해 재판이 진행됐다.

가톨릭교회는 성범죄 의혹이 제기된 신부들을 이 본당에서 저 본당으로 옮기는 등 은닉과 범죄행위가 계속되도록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인륜을 짓밟은 성직자의 범죄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빙자해 은닉할 수 없다는 점이 이번 판결을 통해 명확해졌다. 
재판에서 스톤 판사는 1976년 피해자와의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다(could not recall)는 윌슨 대주교의 주장을 기각하고 “만약 윌슨 대주교가 보좌 신부 시절 플레쳐 신부를 경찰에 신고했으면 그의 기소는 훨씬 앞당겨졌고 후속 범죄와 피해자들을 방지했을 것”이라고 준엄하게 질타했다.  
 
교사와 의사들은 업무 수행과 관련하여 성범죄를 알게 되면 의무적으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반면 가톨릭 사제들은 비밀유지 전통을 지켜왔다. 이번 판례를 통해 법원은 가톨릭 신부들의 고백성사 비밀유지(seal of confession)와 관련해 성직자도 사회인인 이상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연방 녹색당의 사라 핸슨-영 상원의원은 “의회 특검의 건의안에 따라 은폐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호주의 코니 보나로스 상원의원(SA 베스트)은 “고백 성사 공간에서 성추행/폭행을 당한 많은 사례가 의회특검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고 지적하고 “고백 성사의 비밀준수 원칙에 따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판결을 보면서 40여년 전 사건이지만 진실 규명과 정의 구현에는 공소 시효 만료가 없으며 최고 성직자라도 법 위에 어느 누구도 군림하지 못한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또 교회 명예 등 권력을 부당하게 비호하는 조력자도 처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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