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호일보 보도에 의하면 이 곳 한인 사회에서도 이혼율이 점점 더 높아진다는 기사가 나왔다. 연령대 별로의 수치와 원인 분석과 함께 그 문제점들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읽고 나니 무언가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곳에 와서 주례를 자주 서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어떤 말을 해주면 두 사람이 화합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심과 함께 가정을 꾸려 보지 못한 입장에서의 주례사가 신혼 부부에게 온당한 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생각이 일말의 책임감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본인이 시드니에 살면서 주례뿐만 아니라 중매한 적도 여러 건이 있었다. 전부 6 쌍의 인연 맺음에 4 쌍은 헤어졌고(특수한 관계) 2쌍만 남았으니 이혼율로 따져보면 유구무언도 도리어 가볍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근본불교 사상에선 승려는 중매를 못하도록 되어 있다. 윤회와 고통의 근원인 애욕을 부추겨 준다는 뜻에서다. 대승 불교권에 들어와서는 다소의 융통성이 생겨서 큰 문제는 없으나 삭발 염의한 승려가 이성간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 수 없이 징검다리를 놓아준 남은 두 커플마저도 10 여년의 시간이 지나자 왜 저런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느냐는 항변을 몇 번 들었는데 둘 다가 여성쪽이었다. 그 만큼 남녀가 함께 만나서 끝까지 동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본인은 만남의 소중함을 들먹인다. 

사실 불가에서 만큼 인연의 원리를 귀하게 여기는 종교도 없다. 오죽했으면 옷깃만 스쳐도 500생의 인연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했을까? 그렇듯 귀한 만남에 대해서 서로가 등을 돌리려고 할 때 그 고통의 무게도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으면 살고 싫으면 헤어지라고 쉽게 대답하기엔 책임감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하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많은 것을 묻고 대답하지만 가장 어려운 답변이 2 가지가 있다. 성실하지 못하게 사는 지인이 찾아와서 눈물을 훔치면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할 때이고 그보다 더 한 것이 내외간의 갈등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런데도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한 답변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지금 당장 봇짐을 싸라고 권유할 정도이지만 헝클어져 있는 주변 상황을 둘러보면 마치 대추나무에 연이 걸린 듯 해서 그 가닥을 어디에서 부터 풀어야 될지 막막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런 상황을 갈등이 심하다고 말한다. 갈등은 불화의 뜻으로 갈(葛) 칡이며 등(藤)은 등나무이다. 이 둘은 비비꼬이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식물이라 성장의 본성이 서로 얽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의 부정적 측면은 갈등이요 고뇌며 긍정적 안목은 상생이며 조화다. 살아가는 한 가지의 현상을 두고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 주된 요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지혜의 부실함에서 기인되며 그 주범은 ‘자기’라고 내세우는 어리석음이다. 변해가는 모든 것은 물처럼 흐른다. 그 속에서 어떤 것을 고정불변하는 나를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라는 굳어진 관념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평가함으로써 갖은 고통을 겪는 상황을 얽혀 살아가는 식물에 빗대어 갈등이라고 표현한다. 

본래 없는 것을 분명하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헤매는 상태의 사람들을 도깨비에 홀렸다고 말한다. 세상돌아 방망이는 도처에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파워가 센 것이 자기에게 자신이 속는 것이다. 그래서 갈등의 완화는 자기 스스로를 똑바르게 바라보는 마음의 시력을 드높이는 일에 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선은 잠시 틈을 내어 시드니의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새가 날고 비행기가 오가며 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잎새들을 응시한다. 가능한 마음에 응어리진 갈등의 짐들은 내려 놓은 채... 저녁이면 달과 별을 한번만이라도 쳐다본다. 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자전과 공전을 하고 저 밝은 달 표면에 닐 암스트롱이 갔다가 왔다니... 이 우주적 공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저들의 별빛은 어떻게 저렇게도 지속적으로 반짝이고 있을까? 

그 생각을 돌이켜 자신을 바라보자. 나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난 얼마동안 이 지구에 남아 있을까? 그렇게 시공을 크고 길게 바라보면서 자신을 태양에 비교하면 하나의 반딧불과 같고 태평양 바다에 떠도는 한 웅큼의 파도와도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통의 짐을 지고 끙끙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자. 자기 집착으로 인한 이 얼마나 억울한 자기자신인가? 

그렇듯 시야를 넓혀서 깊고 크게 바라보면 갈등이란 거품이 사그라 들 수 있다. 갈등을 피하면서 그 책임을 상대에게 떠 넘길수록 고통의 무게는 곱절로 더해진다. 그 속에 자신의 몫도 함께 얹혀서 불신과 증오도 점점 더 커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칡넝쿨을 자세하게 바라보자. 가는 나이론 줄을 잘도 타고 올라가서 아름다운 연보라색을 꽃피우는 그 식물이 우리 절 전통찻집에 줄줄이 들어산다. 얽혀서 자라나는 칡넝쿨의 생리, 그 겉모습만 바라보고 갈등으로만 느끼지 말고 속속들이 관찰하면 피차가 상생하며 화합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이 말씀하셨다 “멋 모를 땐 풀의 높이가 차이가 난다고 투털거렸는데 풀을 베고 나니 땅이 원래 울퉁불퉁하더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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