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계획했었던 미국 방문을 딸과 사위를 동반해서 3주 동안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다. 호주에서의 7월은 한 해의 겨울을 대표하는 때로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즐길 만큼 몸에 느껴지는 냉기도 차가운 시기다. 그런 추위를 피해서 오빠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여름여행을 떠났다. 싱가포르와 한국을 거치는 일정에 따라서 긴 시간 비행을 한 후에 첫 여정지인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 3일 동안 지냈다. 

천사의 도시 ‘로스 엔젤레스’
이른 아침에 도착한 LA 공항에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피곤한 승객들은 마치 죄수처럼 드넓은 공항실내를 가드라인을 따라서 한 시간 이상 돌은 후에야 이민성 직원 앞에 줄을 설 수가 있었다. 직원들의 대부분은 히스페닉계 사람들로 보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딸의 친구를 보니 반가운 마음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30여년 만에 만난 고향 지인의 집을 방문해서 오랜 회포를 풀었다. 저녁에는 한국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코리아타운의 한국식당에 가서 갈비와 순두부를 먹으며 미국여행의 첫날을 맞이했다. 식사를 하고나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할리우드를 구경하기로 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배우들의 거리, 할리우드를 직접 걸어 보고 싶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넘실거리는 밤거리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보도블록에는 유명한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으며 손바닥 프린트 자국도 볼 수 있었다. 그런 흔적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타로 남고 싶었던 그들. 마이클 잭슨,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타워즈의 스필버그 감독 등 유명인의 이름과 손바닥 프린트가 새겨진 작은 블록 판을 발견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팝의 황제로 불렸던 마이클 잭슨의 손이 의외로 작아서 내 손을 그 위에 올려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왠지 썰렁해 보이는 손자국이 애처롭게 보였다. ‘천사의 도시’ 는 너무 황량할 만큼 땅덩어리가 넓지만 교통체증이 심했고 여행지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 탓일까?

뉴욕, 뉴욕, 뉴욕.. 
LA에서 6시간 넘게 날아서 미국 동부의 상징인 뉴욕으로 날아갔다. 한나라 안에서도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하니 땅덩어리의 크기는 호주를 연상시켰다.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오빠와 올케언니였다. 카톡이나 동영상 통화를 하면서 서로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매일처럼 확인하며 살았지만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기쁨과는 비교 할 수가 없다. 이민나이 30년차 되는 오빠부부에게는 바쁘고 생활력 강한 뉴욕 이민자의 삶이 배어있었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하얗게 센 머리와 이마에 늘어난 주름살이 말해 주는 듯했다. 형제간의 만남은 이렇듯 늘 연연해하는 마음이 든다. 

뉴욕하면 맨해튼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혼자서도 겁 없이 돌아다닐 만큼 뉴욕의 거리가 익숙해 보였다. 의외로 계절이 여름 같지 않고 초겨울처럼 쌀쌀하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기관지가 좋지 않은 나에게는 힘든 날씨였다. 타임스퀘어를 걷다가 세일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두터운 겨울 스웨터를 하나 사서 입었다. 건축사인 딸과 함께 하는 여행은 특이한 디자인의 오래된 건물이나 신축중인 건물들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건축 디자인여행이라서 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미국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는데 뉴욕시내의 여러 지역에서 공사 중인 새로운 건물들을 보니 실감이 났다. 건축 붐은 항상 그 나라의 경제의 흐름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브로드웨이의 작은 골목마다 넘쳐나는 극장에서 어떤 뮤지컬들이 공연되는지 광고를 보고 다녔다. 타임스퀘어는 다양한 인종의 거리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젊음의 열기를 뿜어내는 거리, 올드패션과 뉴 패션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장소를 방문했다. 세계무역센터, 9.11 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그 자리에 메모리얼 센터를 새로 지었는데 생명을 상징하는 물을 폭포처럼 밑으로 떨어지게 해놓았으며 주위에는 동판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손으로 가만히 그 이름들을 만져보며 속으로 기도를 바쳤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오빠부부와 같이 브로드웨이서 전설적인 팝가수 캐롤 킹의 삶을 뮤지컬로 만든 ‘뷰티풀(Beautiful)’을 관람했다. 뷰티풀은 캐롤 킹의 인생, 만남, 사랑, 그리고 그리움과 이별을 노래하는 작품이었다. 60, 70년대를 풍미했던 싱어 송 라이터인 캐롤 킹의 일생을 그린 뮤지컬이어서 관객들의 대부분이 50, 60대의 중년들로 보였다. 관중들은 배우의 노래에 따라 몸을 흔들면서 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추억을 푸~울~풀 풀어내는 듯 했다. 커튼콜을 했을 때는 모두가 기립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캐롤 킹역의 여배우가 피아노를 치며 “You’ve got a friend”를 열창하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며 노래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7년 전,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라이언 킹’을 보고 전율을 느낄 만큼 큰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말에는 친정엄마의 산소가 있는 가톨릭 공원묘지를 방문해서 꽃과 바람개비를 묘석 앞에 놓고 엄마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예수님상이 두 손을 벌리고 있는 아름다운 공원 안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는 엄마에게 막내딸이 인사를 하니 그리움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오빠와 올케언니가 자주 방문해서 묘석주변에 꽃도 심고 손질을 깔끔하게 해놓아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내 손목에 차고 있던 나무 묵주 팔찌를 빼서 언니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뉴욕에서의 일주일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오빠네 가족과는 몇 일 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재결합할 것을 기약하며 짧은 이별을 하고 캐나다, 토론토로 날아갔다. 

캐나다, 토론토 
뉴욕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면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주도 토론토에 도착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나의 절친이 살고 있는 도시. 30여년을 헤어져 살아도 그 마음이 변치 않는 우정으로 똘똘 뭉친 내 친구 부부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서 반겨주었다. 난 이런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내가 인복이 많은 사람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토론토에서는 시립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 기획전시회를 관람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네덜란드 출신의 Iris Van Herpen과 건축가이며 예술가인 캐나다 출신의 Philip Beesley 두 사람의 협연 작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미래의 세상, 사람의 주거, 패션, 자연 친화적인 환경, 바람, 소리 등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었다.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화되어질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토론토 대학교 캠퍼스, 시티의 디자인 스쿨, 무슬림 박물관, 보타닉가든, 마켓 플라자 등을 방문하며 빠듯하지만 알찬 시간을 보냈다. 친구야, 우리는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건강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또 한 번의 아쉬운 이별을 경험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향해서 날아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니 이 노래가 자동으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힐튼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나서 가방만을 룸에 놓고는 Steve Silver가 연출하는 유명한 사회풍자극 코미디 쇼를 보기 위해서 극장(CLUB FUGAZI)에 갔다. 스티브의 ‘Beach Blanket Bobylon’이라는 쇼는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으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도 공연을 했다고 한다. 배우들은 다양한 인물들과 사회 풍자를 묘사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주제에 맞는 큰 가발을 항상 머리에 올리고 나왔다. 강남스타일 음악에 맞추어서 트럼프대통령과 김정은이 회담을 하러 나오는데 관중들의 폭소가 터졌다. 트럼프 특유의 머리 모양과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풍자적인 쇼를 코믹하게 보여주었다.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공연이었지만 차나 술을 마시며 볼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현관로비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큰 덩치의 경호원들이 여러 명 서있는 게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호텔 창밖을 바라보니 안개가 뿌옇게 덮였고 바다가 흐릿하게 보였다. 여름이지만 날씨는 브리즈번의 한겨울보다도 더 추워서 옷을 몇 겹으로 껴입고 도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신비한 매력을 지닌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싸늘한 공기가 감싸는 도시, 안개가 늘 흘러넘치는 도시.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독특한 디자인의 최신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특징은 거리가 높은 언덕의 지형으로 생겨서 걷기에는 힘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균형 잡힌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홈리스(노숙인들)이 유난히 많아서 거리의 분위기를 망가뜨린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의 하나라고 여겨졌다. 거리의 곳곳에 흑인들이 플라스틱 통을 악기로 삼아서 드럼을 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으며 그들은 타고난 뮤지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빈부가 공존하는 도시의 양면성을 엿 볼 수 있다. 

둘째 날 오전 무렵에는 딸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일하던 HOK라는 글로벌 건축회사를 방문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회사였지만 옛 동료와 소장들은 마치 친동생이 찾아온 것처럼 포옹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당시 겨우 23살인 어린나이에 시작했던 첫 직장생활이었다. 딸아이의 반듯했던 지난 삶을 옛 동료들의 환대를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었다. 종합병원 설계팀에서 일하며 환자들이 마음 편하게 치료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딸이 자신들의 선샤인이었으며 정말 열심히 일을 잘했다고 칭찬을 하는 그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팔불출 엄마의 심정이 되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현관을 나서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해져 있었다. 식사약속을 하며 다시 만나기를 청해주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속에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시티 역에서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y)를 찾았다. 10여 년 전에 딸이 공부하던 곳을 방문하게 되어서 무척 감격스러웠다. 자기가 살았던 집, 자주 가던 카페, 도서관, 건축학과 건물들을 모두 보여주면서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면서 엄마에게 설명해주었다. 너무 기특해서 꼭 안아주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 당시에 충분한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었던 상황이 마음 아팠지만 노력한 만큼 성취한 오늘의 결과가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올해로 150년을 맞는 버클리 대학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먼저 생긴 대학교로서 주민들은 ‘CAL’ 이라는 약자를 쓰며 버클리 대학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타워에 올라가니 드넓은 캠퍼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자세히 구경 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여름방학을 맞은 한가한 캠퍼스의 풍경을 한껏 눈에 담아 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버클리 대학생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핫도그 집에 들러서 맛을 보기도 했다. 대학가에서 장사를 하는 탓인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뚱뚱한 주인아저씨는 한 개를 주문했지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기차를 타고 시티로 돌아가는 내 마음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시티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북쪽 지역으로 나가니 전형적인 미국주택과 농장이 있는 시골분위기의 동네가 나타났다. 버클리 대학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국 언니가 미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곳인데 가까이에 시댁 어른들이 동물농장을 하고 있었다. 
선배언니가 그 농장에서 결혼식을 할 때 딸이 호주에서 거기까지 가서 참석하며 축하를 해줄 만큼 친한 언니 동생사이였다. 시댁어른들은 4에이커가 되는 넓은 땅에 소, 말, 염소, 닭을 키운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의 시댁 농장으로 저녁식사에 초대받아서 간 것이었다. 선배언니 부부는 대학 교수인데 본인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중이라서 힘이 들지만 시어른들이 어린 손자들 두 명을 잘 돌봐줘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시티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40도에 가까운 무더운 사막 날씨를 보였다. 시 어른들은 우리 식구들을 무척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마당에서 구워주는 돼지갈비 바비큐와 각종 과일들, 신선한 야채는 정말 맛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생각하면 군침이 도는 멋진 저녁식사였다. 말에게 먹이도 주고 닭장에서 신선한 계란도 꺼내오면서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었다. 기차역까지 픽업을 해주며 마지막까지 헤어짐을 서운해 하는 그 가족들의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정이 넘쳤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어지는 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특별한 심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아름다운 가족이었다. 

셋째 날, 같은 직장 동료였으며 룸메이트였던 건축사 가족을 만나서 함께 브런치를 먹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 친구는 결혼을 했지만 딸과 쉐어하던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으며 아기도 두 명이나 있었다. 딸이 사용하던 방에 가보니 아기 방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나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감동으로만 다가 올뿐이었다. 
그 동네의 집들은 정말 예뻤는데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풀하우스라는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알려져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공원의 잔디밭에는 많은 가족들이 피크닉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다녀간 기록들을 만들었다. 

딸의 옛 동료 친구였던 캐서린이 자신이 살고 있는 소살리토(Sausalito)섬의 보트하우스에 초대를 했다. 자동차를 타고 안개 낀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지나가면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에서 보았던 멋진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육지와 골든게이트로 연결된 섬에 도착해서 섬 주변을 구경하고 바닷가 카페에서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보트하우스가 있는 곳까지 걷기에는 먼 거리라서 우버를 불러서 타고 갔는데 나의 상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선착장이 있는 긴~~ 길 양편으로 아주 독특한 디자인의 주택건물들이 늘어서있고 바로 그런 집들이 물위에 떠있는 보트하우스라고 했다. 예쁜 꽃이 핀 화분들, 조각들, 자전거, 개, 고양이가 있는 동네. 모든 것이 일반 주택과 같아 보였다. 단지 그 주위가 드넓은 바다라는 것만 빼놓고. 캐서린은 타이완 출신의 건축사이고 남편은 미국인이며 유명한 사진작가라고 들었다. 보트하우스 입구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뛰어와서 딸을 끌어안으며 ‘My Sister’ 가 왔다고 배안을 향해서 큰 소리로 파트너를 부르며 딸의 손을 놓지 못했다.

배안에는 예전에 어느 사진잡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석양을 배경으로 나무와 동물을 찍은 사진, 창을 든 줄루족의 전사를 찍은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 아! 바로 그 사진작가였다. 올리버 오일농장과 관광농원까지 운영하는 백만장자라는 귀띔을 딸이 해주었다. 그 사진작가는 직접 팬케익을 굽고 차를 타서 대접하며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의 올리버 농장에서 만든 신선한 올리버 오일이라면서 맛도 보여주고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모터보트에 우리를 태워서 보트하우스 주변의 경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자기 집 건너편에 있는 보트하우스 지붕에는 헬리콥터 착륙장도 있는데 어느 구매자가 220만 달러를 제안해도 주인이 안파는 집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다 위에서 사는 매력에 빠지게 되면 육지의 집에서는 살수 없다는 말을 했다. 어느 날 카메라를 걸치고 기약 없이 훌쩍 집을 떠나면 다른 낯선 땅을 떠돌다가 다시 그 보트하우스에 돌아온단다.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독특한 삶의 한 단면을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 또 하나의 멋진 우정이 이루어졌다고 느꼈다. 다음에는 자신들의 올리브 농장을 꼭 방문해달라는 초대와 함께.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다시 지나가면서 어둠에 물들어가는 소살리토섬의 그림자를 뒤돌아보았다. 길지도 않았던 회사 생활을 하면서 딸이 심어놓은 동료애와 우정이 경이롭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호주에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하면서도 미국으로 돌아갈까 하며 갈등을 겪던 딸의 심정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 회사에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는 소장의 말도 떠올려졌다. 

넷째 날, 관광전차를 타고 언덕길이 펼쳐진 샌프란시스코를 마지막으로 더 보고 싶어서 서둘러 중심가로 나갔다. 티켓을 미리 끊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은 한 시간이 지나도 차례가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다. 시티에 좀 더 머물며 건물 사진들을 찍은 후에 공항으로 나갔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오빠부부와 LA에 살고 있는 조카가족들이 합류해서 그랜드캐년으로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짜놓았었다. 또 다른 행운을 찾아서 라스베이거스를 향해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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