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6일 웨스턴시드니대 휘틀램연구소
이 땅의 원주인인 다룩(Darug) 부족 앞에서 인종차별 위원장으로서 마지막 연설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1985년 프랑스에서 부모를 따라 호주로 이민을 왔습니다. 80년대의 호주는 이민 역사에 있어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호주 최초로 다문화 및 비차별 이민정책이 공식 도입됐고 전국적으로 아시아계 이민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저명한 역사가인 제프리 블레이니 교수는 “이민자들이 호주를 식민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호주사회는 ‘부족 국가’(nation of tribes)로 분열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시 존 하워드 야당대표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호주 사회에 흡수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90년대 연방 의원이 된 폴린 핸슨은 하원 등원연설에서 “호주는 아시아인들에게 물밀 듯이 밀려갈 위험에 처해 있다. 이들은 고유 문화와 종교를 고수하며 ‘빈민가’(ghetto)를 만들고 호주사회에 동화되지 않는다”면서 아시아 이민 반대 논리를 주장했습니다.

제 가족도 이를 주제로 얘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민가정으로서 저희는 식민지화가 아닌 호주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안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시민권을 취득했을 땐 비로소 호주인이 된 것에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소외감은 물론 환영받지 못하는 시선을 받을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 전인 1998년, 여러 자유당 의원들의 지지로 연방의회가 ‘인종 비차별 이민정책’을 단언하고 핸슨의 원내이션당(One Nation) 이 지지를 받지 못해 의회에서 퇴출되면서 인종차별적 위협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오늘날 호주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문화국가라 불리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바뀔수록, 많은 것이 정체된 듯합니다. 20년, 30년 전 겪었던 사회 문제가 이 시대에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현재 호주는 인종과 이민, 다문화주의에 대한 고심에 다시 한번 깊이 빠져있습니다.

호주의 다문화 역사는 하나의 성공담과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룬 호주의 다문화사회는 매우 자랑스럽지만, 아직 ‘완벽한 성공’은 아닌 듯합니다.

인종차별적 정치의 부활
인종차별적 정치가 부활했습니다. ‘도그 휘슬’(dog-whistle : 간접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노린 정치적 메시지) 행동을 하는 정치인이나 ‘인종공격주의’(race-baiting) 논객들이 활개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불과 5년 전만해도 정치 및 언론계에서 극우 정치 세력의 기승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의회와 언론이 인종 화합의 위협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현실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종차별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인종적 차별이 살아있는 소위 다문화주의 사회의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케케묵은 편협함과 우월주의의 흔적이 더해져 더욱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인종차별의 근절을 기대하는 건 무모한 일일 수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은 우리 인류의 영원한 ‘오점’이자 불편한 ‘불치병’과 같기 때문입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원주민의 46%가 과거 6개월 동안 인종차별을 당했고 특히 식민지적 인종차별의 유산인 ‘제도적 인종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비영어권국가 출신의 이민자들도 약 34%의 높은 비율로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경험했고, 아프리카계 이민자의 경우 약 77%가 차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더욱 위험한 상황은 인종차별주의와 정치세력의 결합입니다. 이민과 다문화, 범죄 등을 연관지어 자신의 의제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은 사회적으로 불안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결국 우리의 인종적 관용과 다문화적 화합과 조화를 훼손합니다.

과거 80-90년대처럼 이민자와 소수민족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올 초 멜번의 소위 ‘아프리카 갱단’에 대한 미디어와 정계의 우려가 과열을 넘어서 일부 시민은 저녁 외출까지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말콤 턴불 총리는 지난달 ‘수단계 범죄조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고 공식 발언했습니다. 빅토리아의 야당(자유당)은 후드티를 입은 어두운 피부의 청년들 사진과 함께 ‘무리 지어 사냥하는 갱단 퇴치’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홍보물을 배포했습니다.

한편 지난달 런던에서 개최된 장관회의에서 앨런 터지 시민권•다문화부 장관은 ”호주가 ‘유럽식 분리주의 다문화 모델’을 따라가고 있다”고 경고했고 일부 장관들 또한 호주 내 특정 인종의 케토 확대를 우려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영주권 및 시민권 취득에 더욱 엄격한 영어 구사 조건 도입을 추진할 뿐입니다.

미디어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인기 있는 논객들은 중국이 ‘은밀적 침략’(silent invasion)을 도모해 호주 공공기관 내 '제5열’(fifth column : 적국 내부에 침투해 모략 활동을 하는 조직적 무력집단, 일명 군사간첩단) 공작원을 배치해놨다며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호주 민주주의 제도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래된 ‘황화론(yellow peril: 황색 인종을 억압하기 위해서 내세운 모략)’의 대표적인 양상으로 보입니다. 

언론과 일상생활
언론 보도는 사회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일상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몇 주 전, 시드니의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동네 카페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가와 그에게 “모든 중국인은 공산주의자다”라며 중국으로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NSW의 제니 롱 녹색당 주의원은 지난달 레드펀(Redfern) 지역유세 중 한 시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네가 우리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다 알고 있다. 당신 때문에 우리는 이제 ‘열등 시민(second-class citizens)’)으로 전락했다.”

멜번 아프리카계 조직폭력단에 대한 언론의 여론몰이도 그 파장이 큽니다. 특히 남수단 출신 호주인들은 상당히 실망하고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일부 수단 지역사회 대표들은 매일 수치심과 좌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현실적 결과가 매우 심각합니다. 많은 수단인이 집을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멜번에 사는 한 아프리카계 호주 청년은 친구들과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러 가는 길에 경찰이 무턱대고 불러세웠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누군가 이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새롭지도 또 놀랍지도 않습니다. 이미 과거에 원주민들을 비롯해 아랍과 중동, 아시아계 호주인들이 익숙하게 겪어온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상점에서 쇼핑 중 아무 이유 없이 몸수색을 당하고 택시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종차별입니다. 의심과 분열을 일으키고 목표 대상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인종차별의 씨앗이 뿌리내린 단 한 마디의 정치적 발언이 이들에게 쓰디쓴 열매를 선사합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계에서도 ‘인종차별’을 사업 모델로 활용하는 매체들이 있습니다. 언론사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인종차별적 논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백인계 극우 정치 논객들이 지상파 방송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직설하지만 방송위원회의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인종차별금지법을 위반한 전력이 있는 논객이 반인종적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인종 차별적 발언’이라 지칭하는 대담성까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5일(일) 스카이뉴스에는 폭력전과범인 블레어 코트렐(Blair Cottrell)이 초대됐습니다. 그는 호주 학교 모든 교실 벽에 히틀러의 초상화를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방화, 스토킹, 강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는 범죄자입니다. 매우 수치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이것이 현대 호주사회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新)나치주의자(neo-nazi)도 방송에 나오는데 ‘그깟 인종차별적 발언이 무슨 대수냐!’는 인식인 듯합니다.

저는 언론의 기준과 관점이 잘못됐다고 봅니다.

호주의 다문화주의가 인종 분리주의로 기울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문화적 통합을 보여주는 증거가 수두룩합니다. 평균적으로 이민가정의 자녀가 호주 태생 부모의 자녀보다 교육 및 고용에서 뛰어난 성적과 실적을 보입니다. 또 호주 사회의 유동성은 여전히 국제 기준 상위권에 속합니다. 일각에서 ‘소수민족 게토’라 칭하는 지역들은 매우 역동적이고 활기찬 장소로 어느 하나의 민족 또는 인종 집단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지역들의 부동산 가격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며 빈민가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멜번의 아프리카계 폭력조직 범죄 위기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자면, 빅토리아주 범죄 통계자료에서 비단 수단인 범죄자만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호주, 뉴질랜드 태생의 범죄자들도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왜 수단계 호주인들이 저지른 범죄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호주나 뉴질랜드 출신 범죄자들에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 걸까요? 범죄자의 인종 및 배경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최근 질롱(Geelong)에서 열린 AFL 경기에서 폭력 사태를 불러일으킨 사람의 배경은 왜 논란이 되지 않았을까요? 최근 수년간 발생한 무차별 폭행, ‘원펀치’ 살인을 저지른 자들의 인종적 배경에 대한 초점은 어디 있나요? 아드리안 베일리, 로저 로저슨, 카일 윌리엄과 같은 악명 높은 살인자들의 인종적 배경에 대한 논평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렇듯 인종과 범죄 간의 연관성 기준이 왜 특정 집단에만 국한되고 다른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요?

소중한 가치를 지킬 책임
인종차별에 대한 논란은 영원히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념적 열정과 문화적 분노, 인종적 분개 등이 만연해 소음이 잦아들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변화를 위한 마땅한 이유는 없을지라도 보호받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다양성’과 ‘공공기관’에 모두 도전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언론 매체들의 여론몰이든 ABC 민영화 촉구이든 간에 권력 앞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억압받음으로써 호주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쟁을 즐기는 이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호주에 인종차별금지법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호주 사회가 인종차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의 협력입니다. 각 지역에서 헌신과 결의로 노력하는 많은 지도자와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증오와 편협함에 용감하게 맞선 시민들 사이에서 반인종주의의 힘을 보았습니다. 냉철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인종평등은 이들의 강인함에서 우러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사회는 결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더욱 성공적인 다문화사회와 인종평등을 이루기 위해 부정하고 무시하고 비껴가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다른 국가의 인종차별이 호주보다 더 심각하다며 호주사회의 인종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불성실과 같습니다. 이는 인종차별을 논하는 자를 지구상 존재하는 최고의 나라에 살 ‘가치’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로 치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반인종차별주의는 애국심의 가장 높은 형태, 즉 내가 사는 나라가 번영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한 ‘헌신’입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저 자신의 애국심에 대해 수차례 되돌아봤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본 원칙을 되새겼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거부한다. 인종차별은 우리 자신의 가치와 동료 시민들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에 맞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나라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나라가 더욱 ‘번영’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등’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우리의 가치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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