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우선주의 배제한 턴불 결국 파멸 초래” 비난
기후변화, 이민정책, 동성결혼 등 숱한 이견 충돌
당내 이전투구 지지율 폭락.. 연립 재집권 가능성 점차 하락 

지난 주 호주 정치 파동(당권 경쟁)은 TV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현직 총리를 표대결로 강제 퇴진시키려던 또 한 번의 당내 구테타는 ‘엉뚱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 말콤 턴불이 퇴진했지만 구테타를 주도한 피터 더튼 내무장관은 결국 대권을 잡지 못했다. 턴불의 측근인 스콧 모리슨 전 재무장관이 더튼을 반대한 중도 온건 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규합해 총리로 선출됐다. 표대결 결과는 불과 5표 차이(45:40)로 아슬아슬했다. 더튼 지지세력(43명 서명)에서 3명이 이탈해 이같은 예상치 않았던 결과가 나타났다.

집권 자유당의 턴불 퇴진 과정을 지켜보면서 강경 보수파가 왜 이처럼 혹독하고 무자비하게 당내 구테타를 강행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된다. 호주 정치평론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 놓았다. 턴불에 대한 강경 보수파의 철저한 불신을 다수가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간다. 
 
턴불은 보수 성향 자유당 의원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많은 정치인이다. 턴불은 역대 호주 총리들 중 이른바 ‘스펙(경력)’면에서 가장 화려했다는 평을 듣는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을 두고 미국으로 가버려 홀아버지의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명석했던 턴불은 명문 사립 시드니 그래마를 거쳐 시드니대법대 졸업했다. 이어 ‘로즈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유학을 했다. 대학원 졸업 후 기자, 법정변호사, 투자은행가, 벤처투자가로 승승장구했다. 

턴불이 이름이 알려진 첫 계기는 30대 초반 법정변호사 시절이다. ‘스파이캐처(Spycatcher)’ 대법원 상고에서 변호인으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영국 첩보기관 MI5 부국장을 역임한 피터 라이트(Peter Write)가 퇴임 후 타즈마니아에 살면서 회고록 ‘스파치캐처’를 출간했지만 영국 정부가 민감한 내용을 문제 삼아 출간을 금지시켰다. 턴불은 작가의 변호인으로서 호주 대법원에 상고해 승소(출간 금지 해제) 처분을 받아 매스컴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공화주의자인 턴불이 호주공화국운동(Australian Republican Movement: ARM) 대표(1993~2000년)가 돼 활동을 하면서 특히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높였다. 공화국제정을 위한 헌법 개정(1999년)이 부결됐을 때 호주 총리는 존 하워드였다. 공화국운동의 대척점에 섰던 호주입헌군주제 지지단체(Australian Monarchist League)의 대표가 존 하워드였고 그 후임자가 토니 애봇이었다. 

턴불은 여러 경력을 거친 뒤 사업가로서도 성공해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 정계에 입문했을 때 자산이 가장 많은 정치인이었다. 턴불의 자택은 호주 최고 부촌인 포인트 파이퍼(Point Piper)의 해안가 호화 저택인데 수천만달러로 추산된다. 

턴불은 이런 다양하고 화려한 경력을 가진 뒤 50세 때인 2004년 총선에서 당선돼 뒤늦게 연방 정계에 진출했다. 이제 정치인으로서 약 14년을 마무리하고 31일 은퇴를 한다. 야당 대표, 통신 장관, 총리를 거쳤다.  

턴불은 하워드 정부 시절인 2004년 총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당선돼 연방 정치인이 됐다. ‘공화국운동가 vs 입헌군주제 지지자’로 맞섰던 턴불과 애봇의 대립 관계는 같은 자유당 지도자들로 정치를 하면서도 온건파와 보수파의 지도자로서 대립하며 결국 여러 정책에서 갈등을 빚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과 기름으로 비유된 말콤 턴불과 토니 애봇 전총리

이들의 관계에서는 네 번의 클라이맥스가 있었다. 첫 번째 충돌은 앞서 거론한 1999년 공화국제정을 위한 헌법개정 국민투표였다. 두 번째는 2009년 턴불 야당(자유당) 대표에게 애봇이 당권 도전을 했을 때, 불과 1표 차이로 턴불이 패배해 야당대표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때 당권 도전의 빌미도 야당대표인 턴불이 집권 노동당의 탄소세를 부분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유였다. 

세 번째 충돌은 2015년 애봇 총리에게 턴불 통신장관이 당권을 도전해 승리하며 총리직을 빼앗은 것이다. 총리직에서 강제 퇴출됐지만 애봇은 평의원으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네 번째 클라이맥스를 주도했다. 바로 지난주 피터 더튼의 당권 도전으로 턴불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대결은 턴불 vs 더튼이었지만 더튼을 조종한 배후 인물은 애봇이었다.
    

턴불의 경력과 당내 투쟁에서 보듯이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들과는 과정이 달랐고 정계 입문도 매우 늦었다. 그런 점에서 턴불을 좋아 하지 않았던 자유당의 보수 성향 정치인들은 “턴불은 과거에도 또 현재도 우리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비난을 해왔다. 

이들은 “턴불이 총리로서 실패한 이유는 자국우선주의, 즉 내셔날리즘(국가주의, 민족주의)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퍼붇는다. 이들의 증오는 정책에 대한 차이와 함께 이들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라는 절대적 불신감이 주원인이었다.    

턴불 비난론자들이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내셔날리즘 배척 사례는 기후변화 정책과 연간 15만명선의 이민자를 받아들인 이민정책이다. 턴불은 파리기후협약 핵심인 탄소배출감축 목표(carbon emissions reduction target)에 집착했고 이민자 감축에도 반대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동성애자 결혼합법화 이슈도 턴불과 보수파가 정면 대립했던 이슈였다.   

당권 경쟁 불출마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말콤 턴불 전 총리(오른쪽)와 스콧 모리슨 당시 재무장관(현 총리)

자유당 보수파의 NSW 실세 중 한 명인 콘체타 피에라반티-웰스 상원의원은 지난 주 국제 개발 및 태평양 담당 장관직 사임서를 제출하며 “턴불 정부는 너무 좌파로 치우쳤다. 보수 성향 의원들의 목소리는 줄곧 무시돼 왔다. 이제 자유당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당 보수파가 당내 구테타를 모의한 한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턴불 거부의 근원에는 ‘턴불에 대한 깊은 불신감’이 있다. 그들은 “턴불이 총리 시절 보수 정책을 마지못해 수용했지만 그의 본심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마음 속의 말은 아마도 “자유당 대표였던 턴불은 비밀리에, 마음속으로 노동당 정부를 운영했다(secretly, in his heart, running a Labor government)”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주장이 억측인지 망상인지 아니면 정확한 판단이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체로 보수파들의 편협함은 나라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당권 파동 후 여론조사를 도태로 하면 아마도 내년 총선에서 자유당 보수파들이 턴불을 배척했던 이유가 어쩌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드라마틱한 정치드라마를 보면서 흥미롭고 한편으로 웃픈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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