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사회의 목탁 역할을 해야 된다고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목탁 값이 제법 나갈 때였다. 지금은 전혀 그런 표현을 안 쓰는 걸 보면 그 둘 모두의 가치가 많이 떨어져서 그런 듯 하다. 

신문이야 시류에 따라서 버드나무 가지처럼 세풍(世風)에 흔들린다 하겠지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만고불변의 진리의 깃발을 내세우는 불교계까지도 깨진 목탁 소리를 시정에게 내어보여 짜증을 내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승,속을 막론하고 사람사는 세상이라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기게는 마련이다. 그때마다 바깥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내부의 고름들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커질대로 커지면 터져서 그 오물이 바깥으로 새어나온다. 어떻든 그런 추한 모습으로 시정에 나온 것에 대해서는 당사자나 그 단체에서 책임져야 될 상당한 분량의 몫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모습이 거의 주기적으로 종로 주변을 울리는 것도 매우 기분 나쁘다.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고 실천으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에 그렇다. 초록은 동색이라 하지만 이젠 회색 옷을 벗어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럴 형편도 못 되고 용기도 없고 보니 어둑한 방안에 틀어 박혀 바깥 출입을 삼가고 오소리처럼 지낸다. 

왜 목탁이 깨어졌는가? 바른 스승에게 목탁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그렇다. 제대로 배웠다면 밤새도록 목탁을 두둘겨도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다. 그 바름은 정성스런 자세와 마음의 안정이다. 그를 바탕으로 굳은 신념으로 간절하게 기도해야 본인의 마음에도 번뇌가 사라지고 듣는 이들 또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목탁을 깨는 이는 어떤 사람들인가? 어중이 떠중이들이다. 잿빛 장삼에 모습은 비슷하지만 마음은 허욕에 줄을 댄다. 그렇다 보니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목탁을 잡고 기도를 한답시고 마구잡이로 목탁을 두들기다 보니 그만 깨뜨리고 만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기도하다가 목탁을 깨는 이는 승려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이들은 마치 사발이 깨어진 것과 같아서 아무데도 못 쓴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목탁을 친 경력이 많은 이들이 우루루 장안으로 몰려 들어서 깨진 목탁을 서로 잡고 치겠다고 하니 종로 주변이 시끄러운 것이다. 

그럼 잘 치는 승려들은 모두 어딜 갔는가? 높은 산 골짝에서 두 눈을 감고 앉아 있다. 탐욕과 허세에 눈이 먼 무리들이 판을 치는 한국의 일그러진 현상에서 양화(良貨)는 악화(惡貨)에 떠밀려서 그렇게 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물의 냄새는 양화에게도 번지게 마련이다. 목탁 중 최상품은 살구나무 목탁에 대추나무 채가 제일이다. 그들은 고목이 되어 거의 다 사라져서 이젠 구할 수가 없다. 간간이 진짜 그 나무로 만든 일류 목탁이라고 불교 상품 가게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사용해 보면 금새 깨어져서 그것도 가짜로 도장이 찍혀 버린다. 그렇다 보니 깨진 목탁끼리 내 목탁 소리가 제일이라며 서로 깨진 것을 두둘겨대며 소란을 피우니 그 소리가 두배 세배로 시정으로 퍼진다. 그 둔탁하고 짜증나게 하는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묘안은 없는 것인가? 

사자신중충, 자식사자육(獅子身中蟲, 自食獅子肉) 

열반경에 있는 경고의 말씀이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 그가 죽어도 늑대와 여우 등이 감히 그의 고기를 뜯어 먹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자 몸에서 생긴 벌레들이 그의 살점을 모두 먹어 치운다는 뜻이다. 무슨 단체나 국가가 망할 땐 외부의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로 인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사회의 목탁이 되고 목탁이 또한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그 전엔 가끔씩 시중에서 회자 되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용어조차도 응용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끼리끼리 패를 지어 치고 받는 모습이 일상화 되어 버렸고 언론 역시 금력과 권력을 쫒아 기레기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게다가 좋은 소리나는 목탁을 쳐서 고단한 민초들의 갑갑함을 달래줘야 할 목탁의 무리들도 깨진 것을 들고 나와서 요란하게 두드린다. 소금 역시 짜지 않아 제 맛을 못내서 된장에 곰팡이가 생기게 하고 있으니... 

그 모든 것의 원인은 탐욕이며 오욕(五慾)이 그 주범이다. 권력, 재물, 이성, 쉼의 유혹, 식욕이 그것이다. 흔히들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이라 합리화하려 하지만 지나치면 화근이 된다. 단 꿀도 많이 먹게 되면 토하게 된다. 지혜롭지 못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정신과 육체가 함께 매우 심한 부패의 늪에 빠져 있다. 그러나 간을 맞출 소금도 희망을 줄 목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모두가 우리가 짓고 우리가 받는 자업자득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온갖 보기 싫은 오물들, 폭풍이 일고 홍수가 나서 그것들을 치워버릴 때가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 우린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해야된다. 내 생각의 흐름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바라보는 자기 혁신의 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종교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려는 의지는 있는가? 종교인은 많은 종교가 지향하는 바와는 상반된 분위기라고 질타하는 비종교인의 물음에 대해서 그 답변이 너무나 궁색해진 요즈음이다. 흔히들 4,5차 혁명으로 인간 지능을 능가하는 그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가장 큰 혁명은 자신을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지혜가 생겨서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가게 되는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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