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 한인이주150주년기념비

재호 광복장학회(이사장 황명하)는 2016년 3•1절에 ‘21세기 청소년 독립운동가 육성’을 목적으로 광복회 호주지회의 산하재단으로 설립됐다. 올해는 3기 장학생으로 호주 거주 한인 대학생 나병욱(시드니대 고등교육학과 4학년)과 태초애(시드니대 정치외교학교 1학년) 2명을 선발했다. 두 학생들은 7월 19~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하바롭스크 등 6개 도시의 독립운동사적지 현장답사 교육에 참가했다. 
두 학생의 답사기행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註)

들판 속의 이상설 유허비

독립군가를 열창하며 찾아간 다음 사적지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와 4월 참변 추모비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시간 반을 달리며 답사단원들을 태운 버스가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예 강가의 비포장 도로에 멈췄습니다. 주변에는 오로지 강과 무성한 풀로 뒤덮인 들판밖에 없는 곳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았을 때, 저는 당황스러웠지만 조재곤 교수님의 설명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명으로 알려진 이상설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러시아로 망명한 뒤에는 항일 의병군을 창설하고 권업회 등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고, 병마로 숨지기 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지도자의 자취는 유허비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유허비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유일한 표지이지만, 유허비 주변에 무성한 잡초들과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보며 착잡한 마음에 휩싸였습니다. 한국 정부의 관리 혹은 한국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해 보였습니다. 

1920년 4월 참변 추모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러시아인과 한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 4월 참변 추모비입니다. 4월 참변은 1920년 4월 일본군이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기습하여 우리의 한민학교와 한민보관 등 주요 건물을 불태우고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했습니다. 희생된 한인들 가운데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중요한 독립운동가이자 한인 지도자들이 학살되었고, 유족들이 시체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일본헌병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네 분의 애국지사들이 어디에서 학살되었고, 유해를 어디에 유기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일본군의 부당한 처우에 씁쓸하고 화가 났습니다. 4월 참변 추모비를 마지막으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기념비에서 나병욷, 태초애 학생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의 거주지인 신한촌을 기념하여 세운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입니다. 신한촌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하고 있는 한인 집단거주지로 신 개척리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 구역인 개척리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폐쇄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서북쪽으로 이주한 한인들에 의해서 설립되었으며, 한국의 해외민족연구소에서 신한촌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석재를 한국에서 운반하여 세웠습니다. 지금은 기념탑을 보호하기 위해 쇠창살 울타리와 출입문을 만들었지만 사전에 허락을 받아 답사단원들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기념탑을 눈앞에서 보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기념탑 앞에 위치한 커다란 검은색 비석에는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문과 건립기가 적혀 있으며, 이번 답사에 같이 참가한 이만열 교수님의 성명이 새겨져 있어 많은 단원들의 존경심 어린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유명한 관광지답게 시내나 길거리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지금은 개발되어 해양공원으로 변한, 초기 한인들이 이주한 ‘금각만’ 이라고도 불리던 개척리를 따라 걸어가며 시내를 구경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이 개척리를 고려인촌, 한인촌의 뜻을 담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중앙 도로를 한국 거리라는 뜻의 ‘카레이스카야 울리차’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1911년 5월에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개척리는 강제 철거당했고,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서북쪽으로 이주해 새로운 한인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한인촌은 구 개척리와 구분되어 지금 현재 신한촌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신 개척리 혹은 신한촌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한인사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맞은편에 두고 구 개척리를 따라서 내려간 도로에는 놀랍게도 한인 이주 15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는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에 걸쳐 정착한 한인들이 한인촌 탄생을 기념하여 설립한 기념비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고 가는 도로 한편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며아무것도 없이 환경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러시아 땅에서 어떻게 한인촌을 일궈내고 현재까지도 한국인의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었는지 경외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독수리전망대

시베리아 횡단 하바롭스크로 이동
김 알렉산드라 처형된 ‘죽음의 계곡’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대부분의 독립운동사적지를 돌아다녀 본 우리 답사단은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다음 일정지인 하바롭스크로 넘어가기 위해 대략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기차 안의 상황은 너무나 비좁고 불편했으며, 우리 답사단원들은 마지막 날에 있을 해단식을 준비하며 지금까지 필기해온 자료집을 정리하고, 토론을 하면서 10시간을 버텼습니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후, 곧바로 달려간 빨치산 희생자 추모기념탑은 1918년부터 1920년 시베리아 내전 당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처형되었던 곳으로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이 탑은 러시아의 혁명운동가이자 한국 독립운동가였던 볼셰비키 김 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곳입니다.
 

김알렉산드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인명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회주의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애족적인 항일운동가였던 김 알렉산드라의 역할은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한인사회당을 결성했습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 소속 공산주의 혁명가이긴 했지만 독립운동에도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녀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말했던 마지막 소원인 “8보만 걷게 해다오…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러시아인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이토록 노력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는 제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가치관과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5박 6일간의 러시아 답사를 통해 저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느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대한민국 내에서 이루어진 항일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는 국외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피땀 어린 희생을 한 러시아 볼셰비키들과 애국선열들이 조국독립을 목표로 함께 이뤄낸 결과입니다. 이번 러시아 답사를 통해서 저는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역사적인 독립운동사적지들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느끼고,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분들의 고증과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관과 민족의식, 사명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재호광복장학회의 황명하 이사장님과 임원분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아낌없는 격려와 도움을 주신 재호광복장학회와 매년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항일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독립정신 답사단’ 사업을 펼쳐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 관계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병욱(시드니대 교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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