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 45분
지난 18일 아침, 문재인 대통령 일행이 서울공항을 떠나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평화의 소망을 담은 북진이었다. 머지않아 김 위원장의 남진도 이뤄질 것이 예상된다. 이제는 때가 되었을까? 70여 년 동안 그토록 소원하던 평화가 올 것인가? 저 푸른 판문점 초원 위, 멧돼지가 뛰어놀고 꿩이 날아드는 그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백두산과 한라산을 바라볼 날이 오는 것일까? 빨리 그렇게 되어 아버님 모시고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 청천강 강가를 거닐며, 영변의 약산에 가서 진달래꽃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곳이 내 고향은 아니지만, 나는 결국 아버지가 아닌가? 어제 머리를 깎으면서 오랫동안 거울을 응시했었다. 그때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2. 빨간 스카프
한민족이 하나 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소망이다. 조선소년단 화동(花童)들도 그런 마음이 있었을 터, 순안공항에 내리는 대통령 부부에게 소망 가득한 꽃다발을 건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런 그들 목에는 ‘빨간색 스카프’가 둘려 있었다. 보는 순간 내 마음에는 작은 주춤거림이 생겼다. 그 빨간색은 피로 물든 혁명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 시조는 물론 구소련이다. ‘페레스트로이카’ 개방개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모스크바에 들어가 홀로 버스와 전철을 타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볼쇼이의 백조의 호수를 보고, 캐비어와 꿀을 얹은 검은 흘렙을 먹으며 이리저리 다니다가 KGB 비밀경찰 본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여전히 공포의 장소였다. 포석이 깔린 넓은 광장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광장을 뒤덮고 있는 땅 밑에는 구시대의 유물인 지하 감옥이 있었다. 스탈린으로부터 시작된 잔인한 고문과 숙청 작업이 그곳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모든 시민이 아는데, 무모하게 담대한 관광객을 빼고는 그 누가 감히 실수로라도 그곳에 가겠는가? 광장을 내려다보는 본관 건물에는 수많은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 뒤로 은밀히 숨어있는 감시자가 없다는 보장은 없었다. 스스로 감시하고, 서로가 감시하는 ‘파놉티콘’의 눈을 무시할 수 있는 시민은 그 당시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곳과 지금의 북한은 많이 다를까?

나에게 친숙한 것은 ‘빨간 마후라’다. 1964년에 개봉한 영화로서, 신상옥이 감독하고,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이 주연했다. 당대 모든 상을 휩쓸어 버린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 1월, 대한민국 공군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0킬로 떨어진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승호리 철교를 폭파했다. 이 다리를 통해 수많은 군사 물자들이 평양으로 집결되고, 다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되는 요충이었기에, 반드시 폭파해야 했다. 그냥 두면 중공에서 공급하는 따발총 등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청천강 다리도 미군의 B29에 의해 폭파되었다. 그때의 광경을 직접 보셨던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이제 남북 만남이 시작되었으니, 한 3년 후면 고향에 한번 가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가실래요? 안 가신단다. ‘빨간 마후라’의 감독이었던 신상옥과 주연 최은희 부부를 아예 납치해 가버린 그들 체제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으셨나 보다. 사실이 그렇다. 지금은 서로 포옹하고 웃지만, 갑자기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남북관계다. 이미 그렇게 독하게들 살아온 지 70년,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3. 영변의 약산
평양에서 위로 좀 올라가면 영변의 약산(藥山)이 있다. 그 근처에서 태어난 김소월 시인은 약산의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그리고는 요절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그 역시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면서 친척들에게까지 천시를 받다가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가 33세, 1934년 12월 24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는 왜 예수님 태어나신 성탄절 이브에, 예수님과 같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까?

정말 미스터리인데, 그 영변이 다시 화두다. 진달래꽃이 아니라 핵 제조시설 때문이다.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트럭들 바퀴에는 진달래꽃 대신 핵물질이 발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 회담을 통해 영구폐기 의향이 밝혀진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약초가 되살아나고, 약수가 흘러내리는 약산으로 돌아가면 정말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 고향에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에 다시 교회를 세우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소망도 이뤄지면 좋겠다. 김소월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계셨다. 본인이 사는 마을 혼자 힘으로는 교회당 지을 여력이 되지 않아 산 너머 마을과 함께 짓기로 하고 제비를 뽑았다. 당첨된 것은 그쪽. 흔쾌히 승복하고 두 마을이 힘을 합하여 교회당을 건축한 후, 어머니 손을 잡고 매일 산을 넘어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덥거나.

그렇게 환란의 일본강점기와 참혹한 6.25를 견뎌내는가 했는데 얄궂게도 이산가족 되었다. 북에 남겨진 어머니는 순교하셨다. 요새도 달이 뜨면 북녘을 보시며 어머니를 부르시는데, 어찌 이런 일이 한 가족만의 역사이겠는가? 8천만 민족 모두의 아픔이며,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제 헤어진 지 70년이 넘어간다. 하나님도 귀환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때가 되지 않으셨을까? 사람은 전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해 주시면 된다. 부디 혁명과 전쟁의 붉은 피 대신, 희생과 사랑의 피가 붉게 물들어지면 좋겠다. 피 흘림 없이 과거 청산은 없다. 그러나 공포와 저주의 붉은 피 대신, 해산하는 어머니의 피가 되면 좋겠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뚫고 태어나는 아기의 몸에는 사랑과 승리의 피가 묻어있다. 조국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통일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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