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길은 시드니대에서 영문학 석사 전공 후 현재 이민법무사와 통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2009년 호주에서 수필작가로 등단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캥거루 문학동인으로 수필과 시를 써오고 있다. 

기원전 500년 전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이 없었다. 기원전 5세기의 헬라 철학자들은 글자 그대로 지혜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지식의 범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라고 표현하지만 이들은 그냥 보통사람들 보다 좀 더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깊이 사유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서 사유의 대상은 자연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는 관찰자로서의 인간과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창조한 신들과 정령들까지 사유의 대상이었다. 요즘의 학제로 표현한다면 이들은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신학, 그리고 수학과 점성술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과도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 사람들이었다. 

15-16세기에 이태리의 피렌체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인문운동 즉 르네상스는 다름 아닌 고대의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문헌에 대한 재발견이었으며 거의 1000년을 지속한 중세 암흑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근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로마 교회가 제시하는 교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성과 고대 문헌과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자유롭게 탐구하기 시작한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돌아야 했던 프톨레미의 우주관은 태양이 중심이 되어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들이 회전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 대체된다.  17-18 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통해서 꽃을 피었으며 수많은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서적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런한 새로운 정보들은 1439 독일의 금속공이었던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활판인쇄기를 통해서 전 유럽으로 전파된다. 이러한 정보의 대중 속으로의 급속한 확산은 보통 사람들의 의식을 깨웠고 결국은 루터가 중심이 되었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학의 발흥과 인쇄기를 통한 혁신적인 정보의 유통은 미신에 빠져있던 무지몽매한 대중을 교육받은 시민으로 바꾸어 놓는다.  르세상스가 콘텐츠였다면 구텐베르그의 인쇄기는 하드웨어 였던 셈이다. 

19 세기에 진입하여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전문화/세분화의 길을 걸으면서 르네상스적 통섭적인 인문학으로부터 분가해 나간다.   인문학으로부터 과학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21세기까지 초까지 계속 심화되었으며 같은 과학 분야에서도 여러가지 세분화된 전공으로 갈라지데 된다. 물리학만 예를 들어보면 우주물리학, 이론물리학, 입체물리학, 수리 물리학 이런 식으로 나누어 진다. 세분화되기는 인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인문학은 철학, 문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으로 나누어졌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인 레오나드 다빈치만해도 그는 자연과학, 기계공학, 무기공학, 인체해부학, 생물학 그리고 물론 미술에 이르는 다방면에 걸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 준다 이는 개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려는 통섭적 접근을 했다는 것이 이유라 하겠다.  즉 르네상스의 인문학자가 모든 것을 다 커버하는 제너럴리스트라면 현대의 학자들은 스페셜리스트라고 하겠다. 그런데 전문가의 문제는 깊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넓이를 잃을 뿐 아니라 전망과 조망을 상실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좁은 분야를 넘어서면 세간의 보통사람들과 그 지식정보 수준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진다. 평생을 바쳐도 자기 분야의 전공서적과 논물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전문지식이 방대해지는 상황에서 인접분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학자로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21세기의 학자들은 인접분야는 고사하고 통섭적인 인문학을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도달했다. 

이렇게 세분화되고 갈라진 인문학은 21세기에 와서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인터넷의 등장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미 국무성과 미국의 몇몇 대학이 군사 무기로 개발했던 인터넷 (당시 이름은 DARPANET)이 민간화되고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하는 WWW 웹으로 연결되면서 인류의 지식정보는 가히 메가톤급의 폭발을 맞이한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구글 검색을 하면 우리는 손끝 한 번 클릭하는 것으로 세계의 모든 지식정보를 수초 안에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관련된 지식을 리서치하려면 지역 및 대학 도서관에 가서 긴 도서 목록을 뒤져야 하고 관련된 책을 찾으면 해당 페이지 복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분 단위로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위키피디아는 250년의 출판역사를 자랑하던 브리태니카 사전을 쓸모 없는 지식 소스로 만들어 버렸다. 그 뿐인가? 우리는 안방에 앉아서 또는 기차나 버스 속에서 유튜브에 올려진 세계의 석학들의 강의를 등록금 한 푼 내지않고 청강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텍스트로 유튜브는 동영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지식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주고 있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대중사회의 정보 공유화로 인해서 과거에 여러가지 장벽과 제도를 통해 일반대중의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서 만들어진 지식 카르텔의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암치료를 위해 최근에 나온 의학 정보를 알고 싶으면 암 전문의를 만나서 의논할 필요가없게 되었다. 사실 만난다고 해도 암 스페셜리스트는 환자에게 최신 정보의 모든 것 즉 장점과 위험성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의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위키피디아 또는 암전문 사이트나 유튜브를 검색해보고 한 두시간 해당 분야를 조사해 보면 어느 정도의 깊이 있는 식견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그것도 따끈따끈한 최신정보이다. 

물론 인터넷 상의 모든 정보가 다 정확한 것도 유익한 것도 또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올라오는 정보 쓰나미는 오히려 우리의 방향감각을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페이크 뉴스(가짜 뉴스)가 그 중 하나이다. 그럴듯한 외관을 하고 주요 미디어의 브랜드를 도용한 페이크 뉴스는 이용자에게 그릇된 세계관을 심어줄 수가 얼마든지 있다. 또한 2018년 3월에 내부고발자 크리스토퍼 와일리씨를 통해 밝혀진 영국의 선거 자문 회사 ‘켐브리지 애널리티카’의 페이스 북으로부터 빅데이타(약 미 시민 5천만의 개인정보 및 인터넷 활동 흔적)를 대중행동심리학을 응용한 알고리듬과 접목하여 표심을 ‘조정’했다는 고발은 가희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에 따라 마치 핵물리학처럼 혜택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인류가 3가지 위협 앞에 있다고 한다.  핵전쟁과, 지구온난화 그리고 인공지능의 위협이다. 이 3가지 중 어떠한 하나도 적정 선에서 조정되지 않으면 인류와 인류가 수만년 동안 쌓았던 문명이 하루 아침에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터넷 상의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고 보통 사람들의 지식 경계를 확장해주고 있지만 동시에 동일한 기술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무작위 사찰’을 하는 국가 정보 기관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인문학에서 독립한 과학은 거의 제어장치를 상실한 상태로 보인다.  사람으로 가득찬 도시 한 가운데서 브레이크가 고장된 무인 자동차를 상상해 보라. 또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을 상상해 보라.  또한 현재의 생명 공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DNA를 저렴한 비용으로 아주 쉽게 ‘편집’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과학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공상과학 소설가도 상상하지 못했던 ‘신기술’을 현실화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통 사람들 또는 민주사회의 일원인 시민들이 지식정보를 통해 일정한 ‘전망’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인터넷 시대에 보통 사람들이 통섭적인 인문학 또는 매크로 인문학을 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기능이 작동하는 한 다수의 힘이 소수의 정보 엘리트들의 일탈을 방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의 인문학’은 여가 활동을 넘어 인류의 생존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무길(전문통번역사. 이민법무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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