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부부 10명이 골드코스트에 다녀왔다. 이륙하는 비행기 차창 밖으로 시드니 도심이 보였다. 낯익은 하버브리지며 오페라 하우스 등이 자그만하게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붐비는 도심의  스트레스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보는 골드코스트 주변의 탁 트인  땅과 바다의 모습이 시원스러웠다. 그 바다와 땅을 가르는  백사장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곡선을 좋아하지만, 직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해변이 장관이었다. 감사했다.

오랫 만에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을 걸었다.  맨발에 와 닿는 부드러운 모래며 바닷물의 감촉이 좋았다. 관광지 특유의 어떤 들뜸같은 분위기도 새롭다. 걷다가 넓은 벤취에 누워 하늘과 구름을 쳐다 보았다. 잠시 눈을 감아도 그 잔상이 남아있다. 그렇게 누워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다른 친구들이 커피숍에 간다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더 좋아 즐기는 커피도 사양하였다.  그 하늘과 바람과 바다와 백사장이 감사했다.  

열대과일농장 견학과  과일들을 맛보는 시간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 보는 과일들이 있었고,  굵은 몸통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열매도 신기했다. 숙소인 빌라에서  함께 식사하며 담소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아침마다 기도모임을 가졌다. 4박5일의 일정은 쉼과 사귐의 기회였다.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이어서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몸이 불편한 한 친구가 있었지만 여행을 잘 마치게 되어 감사했다. 

모처럼 골프경기를 했는데 홀인원을 했다. 클럽에서  트로피와 기념품 및 함께 음료수를 마실수 있는 많은 플라스틱 쿠폰들과  주었다.그날 수요일 남자경기에 참여한 회원들이 100여명이 넘었는데, 한사람씩 쿠폰을 건네 주며 피차 축하와 감사의 말을 주고 받았다. 10여년 전  우연히 첫 홀인원을 했지만, 실은 이번에도 전연 기대치 않았던 놀라운 선물이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집 하수구가 막혀 배관공을 불렀다.  하수도 관이 부서져 교체해야 된다고  했다. 두사람이 삼일정도 일해야하는 공사로, 땅을  깊이 파기 위한 굴삭기며 울타리 일부를 떼어냈다 다시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9천불 이상의 공사비가 들었다. 전연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그 비용도 은퇴자인 내겐 부담이 컸다.  또 수영장이 이상해서 사림을 불러 점검해 보았는데, 모터 교체가 필요하다며 7백불의  견적을 내주었다. 나는  감사치 못했다. 스트레스를 느꼈다.

매일 여행을 즐기거나, 매주일 홀인원을 할 수는 없다. 매일 하수관이 망가지거나 매주일 수영장 모터를 교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삶의 희비가 교차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누구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감사치 못하는 날들이 더 많다.

가족관계에서 말하기 거북한 갈등과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 사업이 어렵거나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할 때, 병원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때 결코 감사할 수가 없다. 또한 세상 뉴스를 접할 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아프게 하는 것 때로는 분노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온을 유지 할수는 없을까? 어떤  불교 수도승이나 인도의 구도자 혹은 의식혁명에 전념했던 미국의 호킨스 등은 이것이 가능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처럼 상황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심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꿈이다. 

내가 아는 다른 방법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다. 이것은 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우리 자신이나 상황이 촛점이 아니다.   크신 전능자 그리고 그 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근본적인 차이다.

오래전 선지자 스바냐는,  너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노래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선포했다. 물론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교인들도 많은 줄 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그분의 이러한 사랑을  경험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로 굳게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다. 이것은 저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이었다. 그들은 낙심과 두려움, 허탈감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저들을 찾아가  함께 동행해 주시며, 대화하시며, 성경말씀을 깨우쳐 주시며, 그들과 함께 주무시며, 함께 음식을 드셨다.  

이것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동행, 친밀함과 초청이었다.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감사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와 조건은 이 크신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경험이다. 자주 변하는 우리 자신이나 형편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을 기리는 중요한 예식이다. 이 예식을 ‘유카리스트( Eucharist)’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감사드림(Thanksgiving)’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드린다. 특히 감사할 수 없어 힘들 때에 그런 기도를 소리내어 되풀이한다. 이것이 내가 배우고 있는 감사의 이유와 방법이다.

지난 주일은 감사주일예배에 참석했다. 미국은 이번 주 목요일부터  감사절 공휴일이 시작된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1월 하순이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혹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삶속에 감사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코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도,  각자의 아픔과 두려움, 슬픔 등을  감싸주며 감당케 할 수 있는  더 크고 확실한 감사의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분께 대한 믿음에 근거한 감사였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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