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에 어떤 이가 찾아 왔다. 보리를 보려고 일부러 왔다고 했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녀는 그의 친구가 정법사에 가면 이제 막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를 만날 수가 있다고 일러 주었단다. 

2년 전에 어떤 여학생이 4번지 뒷 뜨락에 한 웅큼의 보리를 심은 것이 밑천이 되어서 올해는 제법 많은 양의 씨앗을 세군데나 뿌려서 때에 따라 물과 거름을 주면서 잘 보살폈더니 이제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보리를 바라 보면서 이게 보리냐고 물으면서 한참 동안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가 전통 찻집 등나무 아래에서 낭낭한 목소리로 보리밭 노래를 불렀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 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보리는 더워야 잘 자라고 더 더울 때 쯤 도리깨로 타작을 한다. 그 무렵 어느날 오후 늦게 소를 먹이러 간 총각이 소는 뒷 동산에 풀어 두고 혼자서 보리밭을 걷는다. 서쪽 하늘엔 이제 막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때쯤은 숨겨둔 옛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마감의 상징인 붉음은 싱그러웠던 푸름의 시간을 뒤돌아 보게 하는 좋은 친구이기에 그렇다. 

언젠가 그는 바람에 출렁이는 푸른 보리밭 고랑속에 숨어서 댕기 땋은 여자친구와 정답게 얘기를 나눴다. 그 뒤로 그 총각이 그 보리밭 근처에서 특유의 긴 휘바람을 부는 싸인을 보내면 그녀는 꼴 망태기를 둘러 메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면서 살금살금 그곳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안 보이면 보리밭 고랑을 천천히 걸으면서 나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그는 소를 몰고 그 곳에 다달았다. 유난히도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자 문득 그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이미 양지마을 박서방의 아내가 되었고 자신은 노총각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로 그 밭 고랑에 서 있는 것이다. 휘파람을 불면 배시시 미소 지으며 나타났던 그녀, 혼자서 그 밭고랑을 걸으면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를 부르던 소리가 귓전에 맴들고 그녀의 홍조어린 얼굴이 눈에 아른 거린다. 머리를 돌려 보리밭 고랑 끝을 쳐다보며 그녀의 모습을 가슴에 안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붉은 저녁 노을이며 들리는 것은 보리 이삭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뿐이다. 노총각은 그 붉게 물든 석양 빛 속에서 보리밭 고랑을 함께 걸었던 처녀의 정다웠던 푸른 마음을 발견한다. 그는 혼자이면서도 외롭지가 않으며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도 싱그러운 아침을 살고 있다. 풋풋한 정감이 따뜻한 마음으로 보리밭 고랑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우리 노래가 바로 보리밭이다. 사랑을 키우며 애잔한 노래를 만들어 주게 하는 그 보리밭이 지금 시드니 정법사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다. 

그 반면에 보리는 가난과 고통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꽁보리밥으로 지칭되는 그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전설이 되어 우리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른다. 지독하게 더운 날 옹달샘에서 이제 막 이고 온 샘물 물동이를 그냥 대청 마루에 놓아둔 채 큰 대소쿠리에 소복하게 담겨 있는 꽁보리밥(보리로만 된 밥)을 큰 놋그릇에 담고 그곳에 방금 이고 온 샘물을 붓는다. 그리곤 놋숫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풋고추를 고추장에 꾹꾹 찍어 먹었던 그 꽁보리밥의 맛, 그 맛은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정도의 진짜 꿀 맛이었다. 그 얘길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땐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게 맛있었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와 함께 본인 생각엔 완벽한 자연식이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동네는 70여 가구가 살았는데 샘물은 위아래 동네 두 군데 뿐이었다. 비비꼬여 자라서 나이를 알 수 없는 큰 고목 향나무 사이의 돌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석간수 약수라 낮에는 물동이를 차례로 두고 기다리다가 움푹 파인 돌에 물이 고이기 무섭게 박바가지로 푸어서 물동이에 담는다. 그렇다 보니 돌도 파여서 호박이 되고 바가지 한 쪽도 모가 닳아서 물이 잘 떠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퍼서 이고 온 물에다 금방 따운 고추를 붉은 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이 어찌 청정 자연식이 아니리요. 논밭에서 일하며 땀을 흘려도 마실 음료수 하나 없어 꾹꾹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 시원한 물에다 만 그 꽁보리밥 맛, 거기다 매운 고추와 고추장을 섞어 먹으니 수화상합(水火相合)이요 이냉치열(以冷治熱)이니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멋진 보양식이 또 어데 있으리요. 목마름과 허기를 일시에 기가 차게 해결해 주었던 그 냉수와 꽁보리밥과 고추장의 삼합(三合)의 조화로왔던 자연식, 그래서 지금까지도 맛 있었음의 최고봉을 지키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렇듯이 자연은 우리 생명체의 모체이며 발을 딛고 사는 근거지이다. 의학이 발달하여 암적 존재인 DNA 유전자를 잘라내는  가위를 발명하고 과학의 기능으로 달에 가서 자기 나라 깃발을 꽂고 오는 지금이다. 그저께는 나사에서 쏘아 올린 인사이트라고 불리어진 화성 탐사기가 206일 동안 4억 8천만 킬로를 날아 가서 화성 표면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2020년 11월 24일까지 그곳의 지하 탐사를 하게 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그 막대한 비용으로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에게 우유 한 병이라도 나눠주고 캄보디아 등지에서 뻘물을 먹고 배탈이 나고 울고 있는 나약한 애기들에게 맑은 물을 제공하는 샘물 하나라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지는 해를 바라보는 목동이 푸른 보리밭 고랑에 서서 그 곳에서 함께 만났던 옛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더 장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곁들여 찬물에 꽁보리밥 덩어리를 꾹꾹 말어서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고 대청 마루에 큰 대자로 드러 누워서 코를 골며 정신 없이 자고 있는 농부의 그을린 얼굴이 더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얼굴에 파리들이 시커멓게 붙어 있어도 코를 드르렁 거리며 골면서 낮잠을 자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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