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새 달력이 비행기를 타고 급하게 도착했다. 한국에서 달력을 만들기 시작하는 시간과 호주에서 나눠주는 타이밍이 맞지 않다가 보니 선박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먹고 나서 새 달력을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 절집 풍습이 된 지가 꽤 오래었다. 60년대 초 절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게 되면서 몇몇 유명 대소 사찰에서 예쁘게 달력을 만들어서 홍보용으로 새 달력을 동짓날에 무료로 나눠준 것이 크게 각광을 받게 되자 지금은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그 여파로 한국에 있는 인연된 사찰에서 해마다 상당량의 무거운 중량의 달력을 거금의 운송비를 부담하며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무거운 박스를 옮겨놓고 그 무게와 운송료를 확인해본다. 상당한 액수에 받는 이의 가슴도 무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잘 받았다는 전화를 할 때면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다. 한국 불교가 해외에선 너무나 열악하다는 소문이 조국에서도 잘 알려진 터라 그냥 받기만 한 것이 서로 간에 묵계(黙契)가 되어서 그렇긴 하지만 마냥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것이 마음이 개운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달력 인심이 좋아지게 된 진원지(震源地)는 농협이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중농정책(重農政策)이 활성화될 무렵에 농자금(農資金)이나 비료 등의 문제로 많은 농민들이 농협을 찾게 된다. 그때 둘둘만 큰 달력을 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면 사랑방 벽에다 달아놓고 사랑의 눈길을 보낸다. 우선은 글자가 커서 눈이 침침한 어른들이 보기에 좋고 음력이 함께 있어서 조상님의 제삿날에 동그라미를 그릴 수가 있어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반면에 새 달력을 받아들면 두가지 걱정이 따라온다. 하나는 올해 진 빚을 이해가 가기 전에 갚아야 되겠다는 책임 의식과 어쩌다가 사이가 틀어진 사람이 있게 되면 새해가 오기 전에 그 매듭을 풀어서 화해를 해야 된다는 화합의 정신이었다. 그때부터 실천에 대한 궁리가 시작된다.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두 내외가 대화를 나눈다. 헛간에 있는 장작과 시렁 위에 올려놓은 고추를 내다판다. 그래도 부족하면 새로 약간의 빚을 더 내더라도 올해 진 빚은 일 년이 가기 전에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불문율(不文律)이 우리 조상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다음은 화해의 문제이다. 살다 보면 불편한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농사를 지을 때라 그 원인도 논에 물을 서로 더 많이 대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소 먹이러 간 손자가 남의 논의 나락을 뜯어먹게 되는 경우 등등의 가벼운 것들이 그 원인이 된 것이 많다. 그런 일들로 인해서 피차가 서먹하게 되어 지내오다가 동지가 다가오면 그 해결책을 찾게 된다. 밤이 긴 겨울이라 길쌈을 하면서 서로가 모이는 집이 있다. 그때 쌍방 간에 잘 통하는 사람이나 말도 좀 잘하고 후덕한 사람을 선정해서 화해의 중매 장이로 나서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저녁에 떡이나 곶감, 아니면 오징어 몇 마리를 들고 상대방의 집을 방문해서 바느질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다가 분위기를 봐 가면서 쉴 참에 그 선물을 내어놓으면서 은근이 화해를 권유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그 집에서 보내왔다고 거짓말로 둘러 된다. 그렇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和答)을 보내게 되어 헌 마음의 앙금은 봄눈처럼 녹아진다. 

자연과 함께 살아왔던 우리네 선조들은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때의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었다. 올해의 잘못됨은 버리고 새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자는 자기 혁신과 함께 희망의 포부로 새 달력을 마음속에 담았다. 그런 새 마음, 새 출발로 호주까지 와서 살게 된 우리 교민들,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의 마음은 진정 어떤 지점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농부는 자연과 함께하면서 생존을 이어간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태양의 열기와 풍우를 맞이하며 고맙게 생각하고 그걸 받은 지상에서 생명을 길러내는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언제나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 순응과 경배는 그분들의 삶의 철학이었고 생존의 근간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뿌린 만큼 거두게 된다는 인과의 법칙을 저절로 배우게 되었으며 차별은 복과 덕 지음의 부족과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수혜를 받은 것은 스스로가 부실한 자기 탓으로 인정하고 언제나 마음속에 큰 무게로 수용하기에 반드시 갚아서 마음이 가벼워지길 희망한다. 그 마지노선이 올해 안이며 그걸 알려주는 신호탄이 새 달력이 되는 것이다. 또한 불화(不和)가 지속되면 남 보기도 부끄럽거니와 집안의 좋은 일에 방해가 된다고 믿고 살아왔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새해엔 좋은 마음으로 맞이해야 되겠다는 자기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좋은 유전인자가 우리 마음속 깊은 바닥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건만 지금의 대부분의 우리 교민들은 까맣게 잊고 지내는 듯싶다. 단지 좋지 않은 질병의 DNA만 자신에게 전이될까 걱정하며 지내는 듯한 것이 작금의 실상이다. 

달력을 바꿔다는 그 횟수가 몇 번이었던가? 우리는 여러모로 많은 빚을 지고 산다. 우선은 자연의 가없는 혜택과 부모님의 무량한 음덕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외에도 믿음에 의존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동기나 친구들의 우애의 교감 속에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너무나 많다. 묵은 빚의 침침한 구름 덩어리를 밀어내고 청천하늘의 맑은 하늘을 맞이하는 새해이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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