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5월 13일 11척의 퍼스트 플리트(First Fleet, 일명 죄수 선단)가 영국 남쪽 항구 포트모스(Portmouth)를 출항해 시드니 보타니만(Botany Bay)까지 24.000km의 거리를 250일 만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3일 빨랐다. 뒤에서 늦게 오는 배는 다음날 도착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정착지인 ‘보타니만’은 바다가 열려 있어 배가 정박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물이 얕아서 배가 가까이 닻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먹을 물도 귀하고 땅도 모래라 비옥하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필립 아서 선장’은 보타니만에 배를 내리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가 해안선 굴곡이 심해 배가 정박하기 좋고 물이 깊어 해안까지 배를 델 수 있으며 물이 많은 포트 잭슨(Port Jeckson)에 하역했다. 
이날이 1788년 1월 26일이다. 이날 아더 필립 선장이 바로 직속 상관인 영국 내무상 시드니 경(Sir Sydney)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군인 및 가족 277명(여성 34명, 미성년자 6명), 죄수 753명(여성 188명, 미성년자 17명)으로 총 상륙 인원이 1,040명이라고 보고했다. 항해 중 48명의 죄수가 사망했다. 또 말 7마리, 양 29마리, 돼지 74마리, 토끼 6마리, 소 7마리가 있다고 보고했다. 

영국기를 게양하고 호주가 영국 영토임을 선포했다. 죄수들이 상륙한 날에 대하여 영국 정부는 기념식을 하지 않았다. 그 후 1901년 1월 1일 호주 연방 정부 탄생 이후 1935년부터 이날을 기념했다. 
그러나 정식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94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데이(Australia Day)’를 공휴일로 정하고 기념식을 갖고 있다. 1967년까지 국민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원주민들은 별말을 못했으나 그 후 “백인의 침략을 당한 날을 원주민들이 어떻게 축하하나? 날짜를 변경하라”고 항의했지만 결국 해결을 보지 못하고 1월 26일을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로 지속되고 있다.
 
다만 녹색당 소속 시의원들이 다수인 멜번 이너시티 지역의 시의회(카운슬)는 시민권 수여식을 거행하지 않고 있다. 연방 정부는 의무 실행을 법제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류 호주인 대상 설문 조사에서 1월 26일 오스트레일리아데이가 적당하다는 주장에 75%가 찬성했다. 또 76%는 호주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88%가 호주 시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92%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며 종교 역시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응답했다.  

다른 설문조사(Exclusive polling firm 리서치)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을 조사하기 위해 18-24세 1천 명을 조사해 본 결과, 55%는 현재 1월 26일을 오스트레일리아데이로 정하는 것에 찬성했고 40%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8%는 ‘침략의 날’이라고 반대했다. 

문제는 호주 땅에 약 6만 년 동안 살아온 원주민도 좋고, 1788년 1월 26일 퍼스트 플리트의 후예인 백인도 좋고, 백호주의 이후 이민 온 사람들도 좋아하는 날을 정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는 처음 ‘이민의 날’로도 불렀다.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받고 새로운 시민으로 호주에 정착하도록 호주 정부는 다문화주의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시리아와 중동사태로 인해 수백만의 피난민이 정착을 위해 유럽으로 모이다 보니 그간 인도주의적이던 유럽의 난민 정책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지에 의하면 유럽의 이민 반대 여론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체코 대통령은 “무슬림 이민자들은 모두 범죄자들”이라고 극언을 했다. 폴란드 집권당 대표는 “피난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라고 공격했다. 헝가리 지도자는 이민자들은 독버섯 같은 존재라고 비난했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극우 지도자는 피난민센터를 방문하면 세계 2차대전 당시를 연상하게 된다고 말했다. 

호주의 극우 성향 정치인 프레이저 애닝 상원의원은 1월 초 멜본에서 극우단체 야외 집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호주는 70년대 초반부터 다문화 정책을 실시했다. 고프 휘틀람 정부(노동당)가 백호주의를 폐지하고 알 그로스비 이민 장관을 내세워 다문화주의로 바꾸었다. 그 후 자유당의 말콤 프레이저 정부도 다문화정책을 주장했다. 이제 40년이 넘었다. 

또한 이민자 구성에서 유럽이 아니고 백인이 아닌 이민자 숫자가 20% 이상이다. 그들(비영어권)의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직종으로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호주에서 기업계 CEO 중 유럽인이나 영국계가 아닌 이민자들의 비율은 고작 2.7%이다. 연방 및 주 정부의 고위 관료직은 1% 미만이며 대학 교직에도 2.6%를 넘지를 못한다. 

과연 호주의 다문화 이민정책이 성공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수단(기독교)인들이 난민으로 시드니 서부 블랙타운 근처에 정착한 지 벌써 18년이 된다. 이들 모든 이민자들의 큰 꿈이 실현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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