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명산이 있으니 그 이름이 고명산(高名山)이다. 명산 중에도 최고의 명산이란 뜻이다. 그 산의 정상은 언제나 짙은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어서 좀처럼 드러나질 않는다. 게다가 기암괴석(奇岩怪石)은 총석정과 짝할 만하며 삼단의 천길 폭포는 쌍무지개로 휘감아서 그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천년의 수림(樹林) 역시 그 기개가 매우 당당하지만 아주 맑은 날 잠깐만 보일뿐 일년 내내 본래의 모습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관광 가이드들의 띄움 말처럼 복덕을 많이 지은 분들이라야 얼핏 마주할 수 있는 고귀한 선물이다. 그 뿐이 아니다. 층층 바위 틈새엔 금,은 등의 칠보가 은하수처럼 묻혀 있고 이 골짝 저 산자락엔 만년장수를 보장하는 갖가지의 선약(仙藥)들이 해마다 꽃을 피우며 그 뿌리를 더욱 살찌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일반인들은 그런 묘약이 있는 줄도 아예 모르거니와 더러 아는 이들도 그저 쳐다만 보고 지나쳐 버릴 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냥 눈앞에 드러난 조그마한 먹거리나 자신을 자랑할 만한 시골 장터를 찾아 다니느라 매우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게 높으면서도 갖가지의 보배적 공능(功能)을 많이 품고 있는 산이기에 고명이라는 최고의 명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런 자연과 함께 하는 희귀한 모습과 묻혀져 있는 가치만으론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4가지가 더 보태지는 조건을 갖춰야 된다. 맹수와 산적, 귀신과 도사가 그들이다. 맹수의 터전은 높은 곳과 깊은 곳이 함께 만나는 은밀한 지점이다. 그곳에 호랑이나 사자 등이 기거를 하면서 이따금씩 크게 소리를 지르면 여우나 늑대 등의 조무래기 짐승들은 오금을 펴지 못하고 숨소리를 죽인다. 산적들 또한 떼를 지어서 산중턱 고갯길 근처의 굴 속에서 지낸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 매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가 고대광실 (高台廣室) 누각에서 부채만 부치고 지내다가 한양에 출장가는 나릿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죽창을 들고 번개처럼 나타나서 그들의 봇짐을 몽땅 털어 버린다. 한 맺힌 귀신들 역시 큰 웅덩이 근처 썩은 고목 주변에서 비오는 야밤에 나타나서 산을 넘는 이승의 나그네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이승의 삶이 너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지나친 욕심으로 원한을 맺지 말고 살다가 저승으로 오라고... 

마지막으로 백발의 도사가 긴 석장을 짚고 텅빈 허공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서 있어야 된다. 그는 정남향 명당 자리에 천년이나 견딘다는 너와집 (참나무를 두껍게 쪼개서 지붕을 덮은 집)을 지어서 새벽 안개를 마시며 영생불사(永生不死)를 꿈꾸는 신선계(神仙界)의 노도사이다. 그가 사는 토굴곁엔 서너 아름이나 됨직한 큰 고목이 있고 그 곁엔 도사를 시중드는 어린 동자가 부채질을 하면서 선약을 달이고 있다. 동자 곁엔 긴 뿔을 인 큰 사슴친구가 물끄러미 그 동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오랫만에 멀리서 귀한 손님이 도사를 찾아왔다. 그가 동자에게 묻는다.“자네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松下問童子)”  

부채를 놓고 동자가 대답한다.“그 분은 신선이 되는 약을 캐러 갔습니다.(玄師採藥去) 이 산중에 계신 것은 분명하나(只在此山中), 구름이 너무 짙어 찾을 수가 없습니다.( 雲深不知處)” 

이상의 내용은 본인의 방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동양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을 해 본 것이다. 경술년 여름에 설봉이란 이가 그린 그 그림은 필력(筆力)도 상당하거니와 시사하는 바의 의미도 깊은 듯해서 방을 옮길 때마다 나를 따라 다니며 뭔가를 일깨워 주려고 한다. 

고명산은 우리 삶의 현장이다. 인간은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의 혼합체로서 언제나 평화를 희망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유발하며 살아왔다. 그런 모순된 상황의 극대화가 오늘날 우리 조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상적 생활이 된지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 원인도 수만이요 해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그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원인 규명이 정확했고 그 조사 결과가 정당해서 피차가 승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우린 놓쳤다는 사실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린 너무 똑똑하다. 특히 남성의 경우 정치에 관한한 모두가 박사급이요 평론가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주장과 고집이 강해서 반대편의 이론엔 아예 귀를 닫아 버린다. 자기 귀는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 듣는다고 서로서로 고함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게도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국, 그들이 모르고 지내는 딱 한가지의 사실이 있다. 그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고명산의 정상을 본 적이 없거니와 그 산속에 묻혀 있는 온갖 공덕의 은혜를 입어 보지 않았다는 경험적 사실이다. 

그 근원은 지혜의 실족(失足)이다. 이 우주 생성의 조화로움과 그에 맞춰 생존하는 우리네 삶의 올바른 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 한 생각이 판을 치며 그것의 지향점은 끝없는 탐욕이다. 그 욕심이 발동해서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그것이 더 심화되면 증오가 일어난다. 증오심이 굳어지면 객관적, 합리적 기능이 상실된다. 그 때엔 무조건적 자기주장만 있을 뿐이다. 작금의 한국 사회를 크게 염려하는 것도 이러한 증오심의 발로가 팽배해 있음에서 이다. 

그 무지의 짙은 먹구름을 걷어내어 아름다운 고명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순  없을까? 그래서 천진무구(天真無垢)한 양심의 소년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탐욕과 증오의 먹구름으로 켜켜이 쌓여진 당신의 의식 세계로는 그 진실의 도사를 볼 수 없습니다. 정답은 대상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옳다는 그릇된 자기고집에서 벗어나는 자기성찰에서 나와진답니다. 그런 무지한 집착심을 버리고 상대방의 말에도 경청할 수 있는 슬기를 발휘하게 될 때 사슴과도 함께 할 수 있는 평화를 이룰 수 있겠지요.”
동자의 독백(獨白)에 귀를 기울인 그 손님, 언제쯤 그 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그 노도사와 마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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