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새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한국 드라마 ‘킹덤’이 화제다. 전 세계 사람들이 본다. 50분짜리 6편으로 이뤄진 한 시리즈를 제작하는데 200억 원이 들었다. 한 마디로 ‘좀비’ 영화다. 죽었는데도 살아서 돌아다니는 존재. 그들은 한 없이 배가 고프다. 다른 것은 안 먹는다. 오직 사람만 먹는다. 그에게 살을 뜯긴 사람 역시 ‘좀비’가 된다. 이전에는 ‘드라큘라’더니, 이제는 ‘좀비’다. 이런 ‘좀비’들이 날뛰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제대로 된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보기도 벅찬데, 뭐 하러 그런 혐오스러운 것을 애써 찾아본다는 말인가? 그래서 난 좀비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잣거리에 화제가 되고 있으니 의무감을 가지고 2편까지 봤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해서 끝냈다. 그런데 계속 신문 잡지들에서 다루고 있어 고민 중이다. 계속 봐야 하는지를.

2.
‘킹덤’의 배경은 조선 시대다. 그렇다고 ‘전설의 고향’은 아니다. 사극 드라마는 현 시대상을 빗대어 풍자하고 고발하는 문화적 장르다. 지금 ‘좀비’ 영화가 유행을 타고 있다면, 이 시대가 ‘좀비 시대’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왕이 평민을 뜯어먹고 착취한 결과, 그렇게 피해 본 약자들이 자기들끼리 집단화되어 몰려다니며, 또 다른 자들을 먹으려고 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말이다. 허무맹랑한 ‘좀비’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연결해 나가는 두 버팀목은 역병과 식인이다. 오래전 역사서를 보면 이런 기록들이 나온다. “계속된 심한 가뭄으로 벼와 보리가 모두 말라버린 데다 전염병마저 발생하여 굶주려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심지어 인육을 매매하는 일까지 있었고, 시체가 길을 뒤덮었다.” 이런 끔찍한 일이 고려나 조선 시대에 적지 않게 있었고, 성경 시대 팔레스타인에는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풍요 속의 기근’이란 말을 많이 하고, 혹자들은 ‘헬조선’이라고도 하니, 우리 사는 곳이 이미 ‘좀비’적 세상이 되었다는 말은 혹시 아닐까?

3. 
성경에도 ‘좀비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바야흐로 세례요한이 목베임 당했던 때다. 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충격을 받으셨는지 잠시 사역을 접고 물러서, 한적한 곳으로 배를 타고 가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좀비’처럼 예수를 향해 달려든다. ‘좀비’의 특징은, 배고픔으로 인한 무작정 질주다. ‘킹덤’의 감독 말을 들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빠른 우사인 볼트의 스피드로, 전속 질주하는 좀비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먹는 것.” 바로 그런 광경이다. 수만 명의 배고픈 인생들이 떼를 지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삐그덕 돌려 바다에 고정한 채, 죽자고 달린다. 상상해 보라. 어떤 ‘좀비’ 영화가 그보다 더 섬뜩할 수 있겠는가? ‘킹덤’이 좀비로 등장시키는 보조연기자의 숫자는 고작해야 3백 명이다. 그런데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예수님을 쫓아다니고 있으니, 드라마보다 더한 아비규환의 현장이 바로 그곳 갈릴리 해변이다. 그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분의 사명은 그 ‘좀비 같은 인생’들을 살려내는 것, 먹어도 먹어도 도무지 배부르지 못한 그들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하늘 양식을 내려 먹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은 다시 분연히 일어서신다. 작은 아이의 도시락인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 아이들과 여자들을 포함하면 3만 명도 넘으리라. 물론 이 기적은 그 옛날 광야에 내리던 ‘만나’의 기적을 재현하며,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주시는지를. 그러나 이번에는 명확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온 세상이 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기적의 끝판왕이다. 만약 이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거나, 더 큰 다른 기적을 달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더 주실 기적은 없으셨다. 그래서 똑같은 기적을 한 번 더 일으키사 4천 명을 먹이시고는, 기적 베푸심을 끝내신다.

5.
그렇게 해서 배불러진 사람들은 ‘좀비’ 되기를 멈추었을까? 아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배가 고픈 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좀비’ 같은 인생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배은망덕 + 한 자리 숫자의 기억력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좀비 같은’ 세상에 물려 죽으셨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좀비’ 같은 인생들에 성찬을 명령하신다. 성찬의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받으라 하신다. 이 무슨 ‘좀비’스러운 말인가 하겠지만, ‘좀비’가 아니라 ‘신비’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음식을 주신다는 말이다. 곧 말씀과 성령, 그것을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는 복된 소식이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좀비 보기는 역겹지만/ ‘킹덤’의 나머지 4편들을 말없이 고이 보면서/ 성찬의 은혜를 아름 따다/ ‘좀비’들 가는 길에 뿌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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