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2월 15일자) 본 난에서 나는 양처럼 온순해져 버린 여기 교포언론 운운했으나 정작 그에 대한 설명은 못했었다. 그대로 넘길 수 없어 오늘 쓴다.
 
 언론에 대하여 온순 또는 얌전과 같은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언론의 사회적 역할 때문이다. 그 역할을 생각하면 언론은 생태적으로 온순하거나 얌전만 할 수가 없다.
 
언론의 역할 가운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게 비판 (비판 보도)이다. 비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될 수 있다. 좁은 교민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권력도 돈도 없어 조용해야 할 이 곳에 뭐 비판할 게 있느냐와 같은 시각이다.
 
 비판 기능이란 넓은 개념이다.  잘 못되어 가는 일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하는 건설적이며 선의의 감시 기능으로 정의한다면 그건 넓은 세계와 국가뿐만 아니라 좁은 해외 한인 모두 규모와 차원이 다를 뿐 똑 같게 필요하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교포언론에도 그 기능을 빼버린다면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 교포신문 환경은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작은 사회지만 지면으로 본 교포매체의 분량은 적지 않으나 그 사회 안에서 잘 못되어 가는 일 또는 더 잘해야 할 일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나 글은 거의 없다.  
 
긍정적 기사
 
 개인과 단체들이 홍보 자료를 보내거나 취재를 부탁하는 결과 나오는 행사 보도, 누가 1등을 했다든가, 돈을 크게 벌었다든가, 높은 사람을 만났다든가, 상장을 받았다는 기사가 주요 지면을 채운다. 그런 이른바 긍정적 기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도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간행물은 될지 몰라도 언론은 아니다. 이 말은 오늘 고국에서 극에 달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무책임한 폭로 보도를 여기에 옮겨져 오자는 뜻은 절대 아니다. 
 
왜 우리 언론은 최소 한의 감시기능을 저버리게 되었을까? 이게 이 글의 핵심이며 본론이다.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말해야겠다. 비판 보도는 그 객체가 되는 개인, 단체 집단으로부터 잘 하면 경미한 불평, 심하게는 여러 형태의 보복이나 공격에 이르기까지 불이익을 버텨야 하는 데 그런 용기가 없게 된 것이다.
 
 왜 우리만이 그렇게 용기가 없고, 양처럼 온순해졌을까? 나는 이 좁은 사회에서 신문을 직접 해봤고, 여러 매체에 직접 글을 써 경험 해봐 누구보다 잘 안다. 언론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는 언론 종사자는 물론 배운 한국인들은 너무 잘 안다. 서방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말 할 것 없고, 한국에서도 이 헌법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잘 되어 있다. 또 그를 위한 막강한 매체 간의 공조도 잘 이뤄지는 편이다.
 
여기는 그게 아니다. 호주에 그런 제도가 없는 건 아니지나 취약한 매체가 현실적으로 그런 제도를 이용하기란 쉽지 않다.  무슨 일을 당하면 사면초가 (四面楚歌)다. 오직 한가지 대안은 약체 매체 간의 연합전선 구축과 구성원의 높은 시민의식과 관심이다.  도마에 오르게 되는 개인과 단체도 매체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사실 여부나 입장을 밝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인사회가 낙후되지 않고 발전할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논의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