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 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 까지 격주로 연재한다(편집자주).

별들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숲이 내다 보이는 뒤뜰 베란다에 차려진 저녁 테이블이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검은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 곧 떠날 우리들!  속옷 두 벌, 양말 두 짝, 그리고 웃도리 두 장을 가슴 속에 개켜넣은 예비 순례자들이다. 환한 달빛이 부서지고 음식이 담긴 접시에 거미 한 마리가 기웃거린다. 향초에 불을 붙이자 둘러앉은 얼굴들이 주홍으로 물든다. 내일부터 산티아고의 별빛 아래를 오래오래 흘러 내려 갈 사람들.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의 오래된 도시다. 정식 이름은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la)로 ‘별 빛 비추이는 들판의 야고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유럽의  카톨릭 성직자와 성도들이 예수와 순교자 야고보를 참배하기 위해 시작된 길이었다. 지금 이 길은 종교적인 순례자들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아 떠나 온 사람들의 순례길도 되었다. 1987년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옐료가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뒤 발간한 ‘순례자’에서 이 길이 그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한 고백이 많은 사람들을 이 길로  불러들였다. 함께 길을 떠난 우리 일행들만 하더라도 길을 걷는 이유는 제 각각 이었다. 내가 이 길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기억때문이었다. 몇 년 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본 강렬한 대비가 왠지 손바닥만한 퍼즐에 갇혀버린 듯한, 애잔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바이올린 몸통 만한 이파리가 늘어진 무화과 나무 아래 플라멩고를 추는 검은 눈의 여인. 하얀색 바지를 꽉 끼게 입고 성난 황소를 향해 빨간 깃발을 휘두르는 투우사와 열광하는 군중 속에서 함께 소리를 질렀던 기억. 긴 머리를 허리까지 내린 채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바스크(Basque) 여인의 카페 유리창. 스페인!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나일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되었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길을 걸으며 오롯이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멀고도 먼 그  길을 갈 수 있을까하며 머뭇거리기만 했었다. 그러던 중 순례의 꿈이 아주 우연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함께 시를 쓰는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년 전부터 순례길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까지 구입해 놓고 최종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는 말에 우리는 바로 손가락을 걸었다. 떠납시다! 천년의 발자국들이 아직도 저벅저벅 걷고 있는 산티아고의 순례길로!

산티아고로 가는 800km의 여정은 하루 20km씩 걸어도 40일 정도가 걸리는 길이다. 20km! 아무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해서 끝까지 잘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사전 준비로 시드니 지역의 트랙킹 코스를 꼼꼼히 점검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2018년 2월 3일. 첫 번째 트랙킹 코스는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를 건너서 바닷가를 따라 걷는 16km 길.  숲 속을 지나고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로 둘러싸인 멋진 집들을  끼고 있는 바다길을 따라 밸모랄 (Balmoral) 비치까지 가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세번 씩 시드니 주변을 걷게 되면서 만났던 밀가루만큼 고운 모래가 깔린 시드니의 비치들이며 발 닿는 곳마다 펼쳐지던 숲과 하늘과 바람. 숨이  막힐 듯한 절경을 품고 있는 이 도시. 우리가 사는 이 시드니가 바로 샹그릴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단계로 시드니 근교의 산악 훈련을 택했다. 이 때부터는 실제 순례길에서 매고 갈 배낭의 무게를 지고 20km 정도의 산길을 걸었다. 시드니 북부의  베로라 내쇼날 팍 (Berowra National Park)을 걸을 때는 더위와 난코스로 인해 도중에 목적지를 바꾸기도 했는데 산 속을 빠져나와 지친 발을 끌고 터벅터벅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했지만 마음은 상쾌했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산행임에도  달콤하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매일 매일 걸어야 하는 순례의 실제 상황을 떠올리며 중간에 쉬는 날 없이 3일 동안을 연속적으로  걷는 훈련도 덧붙였다. 

이룬은 프랑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스페인의 마지막 도시다. 이 곳에서 해산물 빠예야와 에스텔라 맥주, 그린 올리브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순례길의 대장정을 여는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오직 걸어서 가야 하는 이 순례행을 앞둔 무렵, 나는 아직 족저근막염에서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2년 전 바늘로 쑤셔대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으로 시작되었는데, 장시간 서서 일을 함으로써 발바닥 근육을 혹사시킨 결과물이라고 했다. 당연히 의사의 권고는 발바닥에 긴 휴식을 주라는 것과 주문 제작한 밑창을 항시 착용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3개월 훈련기간 중에 발바닥이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훈련을 하는 동안 새로 산 순례용 등산화는 적당히 길이 들었으며 순례길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도 배낭 안에서 편안히 자리를 잡아갔다. 

별들의 들판으로 떠나는 2018년 5월 8일. 시드니 공항 출국장에서 우리 일행 4명은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한 명은 손을 번쩍 들었고 다른 이들은 서로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마드리드 행 개찰구를 향했다. 일생의 동반자인 남편과 지난 3개월 동안 훈련을  통해서 손발이 척척 맞았던 일행들. 24시간을 붙어 다녀야 하는 상황도 문제가 안될 것이라는 느낌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당분간은 맛보지 못할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커피를 마신 후 배낭을 짊어지고 비행기 안으로 걸어 갔다. 

14시간 비행 후에 도착한 중간 기착지 카타르(Qutar)의 수도 도하(Doha). 하마드(Hamad) 공항은 모던하며 이국적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우리들은 하마드 공항 안을 한동안 무작정 걸었다. 다리에 조금씩 피가 통하는 느낌이 왔다. 공항 안은 아라비아 문자와 문양이 어우러져 아라비안 나이트의 텐트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행들이 공항  한적한 곳에 마련된 수면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있을 때  나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 바람을 꿈꾸며 하마드 공항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공항 밖은 보석처럼 빛났다. 어둠과 네온이 전부인 시간. 공항 건물은 캄캄한 허공에 떠 있는 하나의 우주선처럼 보였다. 도하의 빌딩들은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냄새의 별들이 떠 있을지 알 수 없는 채로 우주선 속에 갇혀 낯선 행성을 배회하다 떠나는 듯한 이 느낌…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야 비행기의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7시간을 더 달려서  마드리드의 새벽에  날개를 접었다.  다시 바꾸어 탄 산 세바스찬(San Sebastian)행 이베리아 항공기 아래, 스페인의 불타는 태양이 테라코타 지붕을 달구고 있었다. 청담빛 바다와 하얀색 요트가 어우러진 산 세바스찬!  유럽의 침울한 겨울을 피해서 휴양 인파가 달려온다는 태양의 도시.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길'의 첫 출발지인 생장이다. 그러려면 이룬( Irun)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까지가 오늘 마쳐야 하는 일정이다. 이룬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6km를  차라리 걷기로 했다. 베낭을 짊어지자 오히려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굽은 등이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퉁퉁 부어있는 발로 걷는데도 24시간 동안의 비행에서 오는 피로가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이룬은 프랑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스페인의 마지막 도시다. 이 곳에서 해산물 빠예야와 에스텔라 맥주, 그린 올리브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산티아고 순례길, 그 대장정을 여는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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