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6) 
 
지금 해야 할 일 1: 선한 구조, 잘못된 방향 읽어내기
세속화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반응은 도망이 아니라 분별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분별의 도전은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 나오는 소금과 빛 비유를 잠시 살펴보자. 13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여기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뒤,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빛과 소금으로 나서도록 도전한다. 이와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 누가와 마가복음을 보면, 초점은 ‘제자의 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본문은 조금 다른 뉘앙스가 눈에 띄인다. 소금과 빛의 일하는 ‘현장, 배경’을 언급하는 것이다. 소금은 썩는 것 사이에서, 빛은 컴컴하기 짝이 없는 어둠 속에서 역할을 발휘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피해 도망다니는 빛, 썩은 것을 피해 우리끼리 모여있는 소금이 아니라, 어둡고 썩은 곳 사이에서 역할을 하는 자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이 말하는 ‘분별’은 단순히 나쁜 것을 파악해서 잘 도망다니자란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 때 좋다고 ‘평가’하셨던 원래의 창조 ‘구조’입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자연세계 뿐 아니라, 남녀가 서로 만나 이루는 결혼, 인간의 뛰어난 능력으로 만드는 문명, 정부, 정치, 음악, 미술 등도 포함된다. 그러나 창조의 또 다른 측면은 ‘방향’이다. 인간의 죄는 창조의 구조가 가진 ‘방향’을 하나님을 반대하는 쪽으로 틀어 놓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이 가진 수 많은 장점, 도구, 제도들을 더 파괴적으로 몰아왔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힘입어 하나님의 창조 구조를 다시 구해내는 것, 이를 거룩한 방향, 하나님의 방향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역사에 같이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창조 세계를 볼 때, 두 가지를 같이 볼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아무리 악한 것, 아무리 눈쌀을 찌뿌리게 하는 세속적인 방향 속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선한 구조를 놓치지 않는 눈이다. 동시에 아무리 그럴듯한 껍데기, 괜찮아 보이는 유행, 더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거룩하게 장식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정말 그 방향이 바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능력은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능력을 키우는 노력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1) 먼저 세상의 것 속에서 숨어있는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문화나 상업적 음악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있는 보편적인 음악성, 창조성, 아름다움, 기술적 수준 같은 것을 분별해 누리고, 또 우리도 잘 개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훈련은 특히 그동안 도망을 주로 답으로 삼아왔던 근본주의적 경향의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무조건 기독교라는 뜻이나 글자가 안붙었다고 해서 거부하고, 도망다니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당연하지만 현실을 지배하는 ‘잘못된 방향’을 분별하는 능력도 더 갖춰야 한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영화나 유행, 혹은 기독교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들이라도 할 지라도 그 안에 숨어잇는 물질주의, 탐욕, 성적쾌락, 착취 같은 반기독교적 가치들을 찾아내고, 이 것들을 걸러서 버릴 수 있도록, 영적 비판력을 갖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도 필요하지만, 이를 분석할 수 있는 꾸준한 시도와 이를 통한 자기만의 노하우 축척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나눌 동료나 모임의 존재도 중요하다.
 
창조 구조를 재발견하고, 죄의 방향을 비판하는 눈을 가지는 것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선한 구조와 악한 방향은 너무 오랫동안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눈을 가지도록 자꾸, 생각해보고, 고민해보고, 격려해주고, 시도해 봐야한다. 이를 통해 참다운 분별의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2: 성경의 큰그림을 더 많이 이야기하라
두번 째로 현재 시급한 문제는 정신없이 전개되는 세계관 전쟁 속에서 어떻게 해야 기독교 세계관을 ‘내 삶의 일부, 내 문화’로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문화화 과정은 기독교세계관 단기 속성과정을 수료하거나, 책을 붙들고 하는 학문적 연구, 혹은 선교여행 한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생활에 항상 깊이 적용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 나의 가치관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을 대개 두가지로 묘사한다.
 
하나는 바울처럼 극적인 경험을 통해 확 바뀌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디모데처럼 신앙의 유산을 받아 차분히 자라난 경우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두가지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두가지 관점일 뿐이다. 왜냐하면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경험조차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섭리와 준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루할만큼 긴 제자훈련 과정이 등장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종종 첫째 제자,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선뜻 반응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데는 3년이란 긴 기간이 걸린다. 이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사람과 사회, 온 우주의 변화는 혁명으로 갑자기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세부터 있었던 오랜 계획의 결과로 예수님이 오셨듯이, 이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된 회복의 과정은 오랜 씨름과 고민을 수반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고민과 함께 방향을 제시하고, 모델을 보여주며, 동시에 균형잡힌 접근을 이끌어주는 ‘바른 복음의 선포’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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