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다.  비가 멎더니,  하늘이 더 맑고 높아 보인다. 정원에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국화꽃 송이들이 굵어져가고 있다. 아침 걷기를 하면서 문득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을 알았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하늘과 바람, 온 몸에 느껴지는 청량감,  가을꽃등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모든 꽃들이 아름답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를 돋보이게 하는 부케는 더 아름답다.  예식후에는  예비신부가 될 다른 친구에게 의미있는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부케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하객들의 시선을 신부보다 더 받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부케가 아니다. 

어느 교회의 창립예배에 참석했다. 교인의 수나 재정규모가 많지 않으나 20여년동안 원주민 선교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 강대상 옆,  작고 평범한 화병에 어느 교우가 집에서 꺽어온 듯 싶은 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꽃장식이었다. 원주민 선교며 그 교회의 모든  분위기와  잘 어울려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격언이 생각난다. 시대와 지역 혹은 개인의 주관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가령 중세의 기준은 빛과 색체에 대한 동경이었다.  현대에는 철과 유리,  상품성과 연결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여성미에 대한 기준도 지금은 보통 날씬한 몸매를 선호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오히려 굵은 허리의 여성이 부유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 아니 지금도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에서는 그런  여성이 건강과 번영을 의미하는 이상형이다. 

나는 시각적이고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그 기준은  쉽게 시드는 꽃처럼,  유행처럼 자주 변한다. 문화와 시대에 따라 편차가 크다. 그러나 내적인 아름다움과 그 기준은  보다 일관적이다. 가령 외모나 체중, 나이에 상관없이  내면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얼굴은 다 아름답게 보인다. 작은 배려나 친절은 모두에게 환한 미소를 번지게 한다.반면에  젊고 예쁜 여성이라도 화내며 짜증내는 얼굴은, 누구나 호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내적인 아름다움은 멀리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고, 가까운 생활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카톡 멧세지 하나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휴스톤의 아들이, 그곳은  봄이 한창인데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하다 정원의 꽃들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몇개 찍었다며 카톡으로  보냈다. 평범한  그 사진들이 아들의  마음이, 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아름다운 선물이 되었다. 최근에 어린 자녀 세명과 함께 시드니에 정작한  한  젊은 어머니의 말을 전해 들었다.  이곳 생활이 어떠하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미안하다’고 답했다.  서울은 미세먼지로 어려움이 큰데, 시드니는 공기가 너무 깨끗해서  그곳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이라 했다.  새로운 정착과정이 쉽지 않을텐데,  공기 등 작은 문제로 인해 감사하면서 또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느끼는  그 마음씨가 아름답지 않는가! 

나이나 외모에 상관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자기와 다른 낯선 이웃이라도 포용하고 배려하는 자는 더욱 그렇다. 지난 3월 22일, 호주연합교회의 주관으로 여러 기독교인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타운홀 광장 집회가 있었다.  뉴질랜드 모스크 테러를 규탄하며, 그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슬픔에 연대감 (Solidarity) 을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사실  그 테러 사건은 무슬림공포증, 인종차별주의 혹은 백인우월주의 등의 편견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는 호주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직접 연관된 충격적인 사건이다. 우리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게 한다. 유대인 커뮤니티에서는 그 테러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와 무슬림, 유대인들과 무슬림인들은 역사적으로 충돌과 대결이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갈등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생명과 가족을 중요시하며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모두  꼭같은 인간들이다. 그런  차원에서, 시간을 내어  저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곁에 서주는  따스한 마음챙김이 아름답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의 저자 배철현은 긴 인류역사를 서술하며, 그 모든 과정을 꿰뚫는 하나의 통찰로 마무리했다. 그것은 ‘인간 생존의 비밀은 이타적 유전자다’라는 주장이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타적인 섬김의 대명사인 테레사 수녀는, 그 분의 삶은 참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도전을 준다.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 그런 삶은 쉽게 흉내낼 수 없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에게 이타적인 행동과 작은 희생은 가능하지 않는가?  이타적인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실제적인 유익을 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을 더 활기차게하고, 행복을 더해 준다는 사실이다. 이타적인 생각이나 말,  친절과 배려는 언제나  더 큰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된다.

동물의 세계를 흔히 양육강식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모든 이기적인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나 요즈음 국제 관계며 정치, 사회 뉴스를 보면 우리 인간도 동물의 세계와 큰 차이가 없는것 같아 씁쓸하다. 가끔 교민 사회에서도 사업이며, 자녀교육, 아니 목회나 선교까지도 그와 비슷한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중심, 자기 그림자 속에서 이웃을 보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그런 말도  이젠 변해야 되는 것일까?  참된  승리와 생존은, 그런 경쟁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비밀이다. 나는 그 것을 믿지만, 결코 다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신비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남은 사순절 기간에는, 떨리는 심경으로 그 분의 현존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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