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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가는 길] 일상을 사는 ‘알베르게 주인’과 일상을 떠나온 ‘순례자’양귀비 꽃길 따라 순례자들은 개미처럼 곡선을 그리며 산허리로 숨어든다.
백경(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 승인 2019.04.18 16:40
팜플로나를 벗어난 순례자는 개미처럼 곡선을 그리며 언덕위로 올라가 산허리로 숨어든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한 순례길이 나흘째로 접어든다.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몇몇 익숙한 얼굴들도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오후 늦게야 도착한 팜플로나(Pamplona),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옛 도시가 막 낮잠(Siesta, 오후2시-4시)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구시가지 입구에 위치한 알베르게인 ‘자마(Xarma)’ 벨을 누르자 핸섬한 스페인 청년 페드로가 문을 열어주며 따뜻하게 맞아준다. 안으로 들어서니 60대 쯤으로 보이는 순례자가 빨간 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라운지를 가득 채운 커피 향, 불과 며칠 전 집 근처 샬롯테 카페에서 즐겨 마시던 카푸치노 한 잔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시간, 저 멀리 샬롯테 카페도, 스윗 홈도 별빛 아래 잠들어 있겠지…  

다섯 명이나 되는 일행은 숙소인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각자의 우선 순위가 있다.  가령 J는 가장 먼저 세면대로 달려가 양치질을 하고, S는 주방을 점검한다. 우리보다 연장자인 박경 선생과 그녀의 남편 W는 침대에 하얀 위생 커버를 씌운 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나는 땀에 젖은 옷을 빨기 위해 빨래터로 달려간다. 뒷 마당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촘촘히 널려있다. 아무래도 내일도 배낭에 젖은 양말과 수건을 옷핀으로 걸고 걸으며 말려야 할 모양이다.
 

이른 새벽 일행은 어둠 속에 잠든 팜플로나를 벗어나 들녁으로 향하고 있다.

알베르게 주인 페드로는 순례자들의 뒤치닥꺼리로 분주하다.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과 일상을 떠나온 순례자, 그 간격 사이에서 어설픈 순례자의 시선은 분주하게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창밖 사람들에게 머문다. 저녁식사 시간이 될 무렵 페드로가 바스크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나바라(Navarra) 로컬 와인 한 병을 선물로 건네준다. 우리는 며칠 만에 와인 잔을 다시 기울이며 문명인의 분위기를 내본다. 그러나 고단함을 참지 못한 순례자의 눈꺼풀은 와인 잔을 채 비우지도 못하고 꿈 속 세상으로 떨어진다. 알베르게 주인장도 어두워진 바깥 세상을 커튼으로 덮고 하루를 마무리 한다.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긴 여정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로아상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하며 느긋하게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배낭을 꾸리고 있는 70대 순례자를 만났다. 소피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6년 전 딸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고 했다. 이번엔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다시 찾아 왔다는 그녀. 모녀 지간에도 서로 간의 거리가 필요한 것일까? 문득 30여 년 전 저녁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지금은 꿈속에서도 교신이 힘든 까마득한 거리에 서 있는 그녀를…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에게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내려놓고 가라는 듯 바람이 손을 내민다. 하지만 ‘용서라는 짐’을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늦은 점심을 한 후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시가지로 나갔다. 좁은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이런저런 것을 팔고 있는 상점들을 둘러본다. 골동품 상점 진열대 앞에서 작은 나무 물고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짐을 진 순례자에게 물고기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골목 끝 지점에서 거인처럼 서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만났다. 바람을 피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 가까이 다가가니 누군가 피워놓고 간 촛불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꺼져가는 촛불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봉헌 초 하나를 집어 불을 밝혀놓고 밖으로 나오니 어스름한 저녁이다. 발걸음이 성벽으로 향한다. 저 멀리 산 능선 어디 쯤 내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있겠지… 

주방에서 S와 J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J가 준비한 저녁상은 그야말로 매직이다. 해산물을 넣어 끓인 닭 백숙은 처음 먹어보는 별미다. 또한 남은 밥으로 누룽지까지 만들어 내는 그녀의 묘기에 가까운 솜씨에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나는 설거지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집에서 보다 더 잘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순례길에 이래도 되는지 하는 생각에 밥을 삼킬 때마다 뭔가 불편함이 목에 걸렸지만 강한 식욕을 꺾지는 못했다.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를 향해 가던중 카페에 들어가 점심 겸 휴식을 하였다

다음날 새벽, 짐을 꾸린 일행은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라는 뜻)까지 24.4km을 걷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도시를 벗어나는 길은 도시로 입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점과 도로를 끼고 한 참을 걸어나가야 한다. 중간 중간 오래된 몇 개의 마을을 지나니 푸른 들녘으로 이어진다. 보리밭과 밀밭을 붉게 물들인 양귀비 꽃길을 따라 순례자들은 개미처럼 곡선을 그리며 언덕위로 올라가 산허리로 숨어든다. 저 멀리로 산 능선에서는 프로펠러가 새벽부터 바람개비를 돌리며 전력을 만들고 있다.  

경사진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높이 790m 지점에 위치한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on, 이하 페르돈), 일명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순례자 형상을 한 철제 조형물이 언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순례자들에게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내려놓고 가라는 듯 바람이 손을 내민다. 하지만 용서라는 짐을 이렇듯 쉽게 내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짐을 내려놓은 순례자들이 조형물 앞에서 활짝 웃으며 인증 샷을 찍고 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이정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시드니 17,500km, 서울 9700km,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556km… 

옆에서 같이 앉아 쉬고 있던 순례자가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나도 벗어놓았던 양말과 신발을 급하게 찾아 신는다. 오랫동안 몸에 밴 빨리빨리가 한껏 발동하는 순간이다. 충분한 휴식을 하지 못했는데도 옆에서 일어서니 자동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작년에 순례길을 다녀온 지인이 해준 말이 떠오른다. 순례길의 승패는 10일이 고비라고 했다. 두 시간 마다 휴식을 하며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체력이 향상되고 또 몸도 자연스럽게 길에 순응하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느긋하게 걷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초짜 순례자는 불규칙한 걸음으로 앞선 순례자를 경쟁하듯 쫒아가고 있다.   

높이 790m 지점에 위치한 알토 델 페르돈, 일명 ‘용서의 언덕’ 에 올라가니 순례자 형상을 한 조형물이 “마음의 짐은 내려놓고 가라”고 바람의 손을 내밀었다.

페르돈 언덕을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인데다 자갈이 많은 길이다. 충분히 쉬지 못한 발걸음이 연신 헛발질을 해댄다. 등에 매달린 배낭이 어깨를 다시 조여온다. 이 1kg도 채 되는 않는 초경량 배낭을 순례길 출발 며칠 전에 구입했다. 그리고 침낭과 최소한의 필수품을 넣고 배낭의 무게를 내 몸무게의 10분의 1에 맞추어 짐을 꾸렸다. 그런데 여정이 길어질수록 배낭이 내용물의 무게를 버텨내주지 못하고 어깨를 누르며 고통을 가중시킨다. 허리에서 내용물을 받쳐줄 적정량의 배낭무게도 필요했던 것을 간과한 탓이다. 내게 지워진 무게를 회피하다가 생긴 일, 언제 쯤 배낭도, 나도 편안하게 한 몸이 될 수 있을까?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해서 전화로 예약해둔 ‘하쿠에(Jakue)’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었다. 피로에 지친 일행은 빨랫감을 모아 4유로를 지불하고 세탁 서비스를 맡겼다. 저녁을 담당하기로 한 박경 선생과 나는 타운으로 걸어 나가 식료품 가게에서 빵. 올리브. 과일. 하몽. 초리조. 와인 등을 구입해 와서 저녁상을 차렸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와 박경 선생은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재료 그대로를 살려’ 하몽 초리조가 들어간 바게트 빵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동안 일행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려 주었던 J과 S는 우리가 준비한 저녁상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뭔가 다른 요리를 해 먹기 위해 주방 쪽으로 가서 후라이팬을 찾는다. 나는 이왕 차려진 음식이니 오늘은 간단하게 먹자고 했고, J와 S는 불편한 안색을 감추지 못하며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말이 없어진 식탁에선 마른 빵 씹는 소리만 들려온다. 누군가 어색함을 풀어보려고 와인 잔을 들어 마음을 합쳐 보려하지만 이미 나버린 작은 실금들, 창밖에서 잿빛 구름이 와인 잔 안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다.

백경(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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