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초대된 강사 부부와 집회 후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출출해져서 시내의 차이나타운엘 들렸다. 밤 열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이니 요란한 클럽을 제외하고 시드니에서 갈만한 곳이 이보다 딱히 없었다. 다행히 금요일 저녁이니 시내의 거리엔 ‘불금(?)’을 즐기러 나온 젊은 사람들의 활기찬 얼굴들이 보이고 환히 밝혀 놓은 거리엔 관광객의 눈길을 끌만한 거리 노상들의 재미난 물건들이 이곳 저곳 흥미를 유발한다. 
시드니 역사가 딱히 두드러진게 없고, 몇 마디 차이나타운에 대해 설명하자 곧 대화 밑천이 부족하던 차에 “한국에서 엄청 인기있던 물건이 시드니 차이나타운에서도 이렇게 팔리고 있다니..” 하며 머리 위에 쓰면 귀가 쫑긋하게 올라가는 제품 설명을 오히려 들을 수 있었다. 크게 소리지르며 물건을 파는 중국 억양의 영어 발음이 왠지 친근하고 북적대는 시장 같은 분위기는 점잖은 강사님 부부의 의전을 편안하게 만든다. 사뭇 집회 속의 무게감있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차이나타운은, 감사하게도 자신들의 식당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바지런한 손길로 지나는 고객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는 친절한 손님 접대 서비스까지 나대신 제공해주었다. 

오랜 전부터 알고 있던 죽집이 있다고 하니 맛있을 것 같다며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별다른 내부 장식없는 허수룩한 중국집을 선뜻 찿아 들었다. 죽을 좋아 하는 아내의 몇 마디가 메뉴선정에 대한 모두의 마음을 쉽게 결정짓게 하는 의도적인 역할이 뒷받침한 결과다. 길거리의 사람들을 비집고 호객하던 직원의 안내도 없이 불쑥 들어선 식당엔 의외로 많은 손님이 늦은 밤의 야식을 즐기고 있었다. 제법 큰 식당이지만 오래전 칠해 놓은 내부 페인트도 색이 바래고 벌써 수십년은 된 듯한 식탁이며 의자와 내부 장식에서는 아무런 화려함도 찾을 수 없지만 늦은 밤에 식당을 채운 손님들이 식당의 관록과 명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참으로 오랜 만에 찾은 곳이다. 벌써 20여년 전 부터 많은 사람들과 여러 번 다녀간 익숙한 곳이다. 행사가 있던 그 때마다 다른 손님들과 이 곳을 찾아 왔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신나 떠들고 웃던 기억들이 이곳 저곳 그 때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니 여러 지나온 반가운 얼굴들이 기억에 뭍어난다. 불현 듯 찾아온 엣 식당에는 기대치 않은 추억이 서리고 또 새로운 만남의 즐거움이 메뉴를 펼치는 모두의 얼굴에 환한 기대감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알던 메뉴로 쉽게 주문을 마치고 몇 분이 지나자 해산물이 가득 담긴 큰 죽 그릇에는 김이 피어오르고 조개 요리와 야채를 담은 접시는 금새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다행히 손님들은 선택한 메뉴 모두를 좋아했다. 메뉴 덕분에 대화는 더욱 재미를 얻고 밤은 늦었지만 피곤 한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손님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번 죽집엘 가자고 해서 다른 밤에 그 곳에 다시 한번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죽 동지’라 부르며 또 한번 웃었다. 헤어지며 나누는 따뜻한 악수와 환한 눈매엔 좋은 만남에 대한 감사와 기대가 있다. 그들의 넉넉한 마음에 담긴 너그러움 때문이다. 기획된 목적없이 만난 손님 맞이는 그저 만남에 즐거움이 있다. 어수룩한 진심으로 베푼 서툰 친절이지만 되돌아오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은 다른 어떤 선물 보다도 값지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만남엔 많은 셈법이 있었다. 세상의 만남엔 자신이 원하는 이해타산의 이득이 없으면 차가운 이별을 감수 할 수 밖에 없는 비정한 논리가 존재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찾아간 혈맹 미국은 아무런 선물도 없이 손님 맞이를 했다. 격식만 가득한 화려한 만찬은 속없는 손님에게 미련한 기대 속에 끝까지 속절없는 방황을 결과물로 남긴다. 빈손으로 돌아서는 전용 비행기 트랙에 선 대통령의 웃음엔 속빈 강정과 같은 허상이 있다. 진정성 없는 친절과 진심없는 우정은 돌아서는 발걸음을 허무하게 만든다. 기능성이 모자란 물건을 가차없이 버리고 새 물건을 집어드는 상인은 이윤이 남는다면 무엇이든 버리고 새 것을 살 수 있는 잔인함이 있다. 상인의 마음으로 사는 세속의 속셈은 더욱 속셈 빠른 세상을 재 창조한다. 

철학자 마틴 부버는 “신은 사람에 대한 관계에 들어설 때 그 관계 속에 자신의 절대성을 끌어 들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 신의 선한 속성이 개입되지 않으면 인간들의 관계는 항상 세속적인 셈법으로 결산될 것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듯하다.  손님 맞이에 늘 서툰 인간에게 신은 여전히 그의 넉넉한 자비를 베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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