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총독 피터 코스크로브 경(Sir Peter Cosgrove)은 지난 4월 25일 켄버라 전쟁기념관에서 앤작데이 기념 연설을 통해 젊은이들과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1915년 갈리폴리(Gallipoli) 전투 이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호주의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 되었음을 깊이 생각하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군 총사령관을 지낸 군인 출신이다. 세월이 지나 갈수록 앤작데이의 참 뜻이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유럽 중심 전쟁) 당시 호주 인구는 300만명을 조금 넘었다. 33만명의 호주군이 유럽 전쟁에 파병됐다. 이 중 약 6만명이 희생돼 18.2%의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호주군은 영국, 미국, 뉴질랜드, 프랑스, 인도 등 연합군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전승국가의 일원으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일이 점령 통치했던 뉴기니아(현재 파푸아뉴기니)를 얻게 되었고 태평양 서남부의 이권을 차지했다. 

호주로서는 대 승리였다. 당시 호주는 일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러시아(백인)함대를 무찔렀던 강한 이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일본은 강화회담에서도 호주의 백호주의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한 휴스(Hughes) 호주 총리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이 문제를 없던 것으로 했다. 

호주의 각주는 과거 영국의 독립된 식민지였지만 1901년 호주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 체제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이며 최고 부국이었다. 영국에서 약 25,000km 떨어진 태평양에 있는 인구 300만명 정도의 섬나라로 간주됐다. 당시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왔는데 대부분 재정적으로 가난했다. 절반 정도는 호주 정부가 여비(이주 비용)를 제공해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영국에서 호주 이민을 모집할 때 광고 내용을 보면 미국과 달리 “호주에 오면 한 주 3번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유혹 문구가 포함됐다. 고기가 부족했던 영국에서 대부분의 서민들은 피시 앤드 칩스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럭키 컨트리(Lucky Country)'란 제목의 책을 저술한 고 도날드 혼 교수는 호주를 하류 시민(second-class citizens)으로 표기할 정도였다. 

호주는 모국인 영국과 같이 전승국 대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역시 전승 국가로서 많은 혜택을 받았고 넓은 땅과 광활한 해양, 남극지역 권리 등 많은 혜택을 얻어냈다.  

결과적으로 10만명의 호주 젊은이들의 희생이 우리가 사는 땅인 호주를 윤택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올해 앤작데이 다음날 시드니모닝헤럴드지는 가슴 뭉클한 기사를 게재했다. 남호주의 벤자민과 엘리자 포터 가정의 참전사였다. 애들레이드에서 북쪽으로 250km 떨어진 작은 농가에 살고 있는 포터 가족의 4형제 토마스(31세), 에드워드(25세), 랄프(24세), 허틀(Hurtle, 22세)이 모두 입대했다. 이들은 아버지 벤자민처럼 농촌의 목수와 빌더들이었지만 참전을 지원했다. 
호주 군 부대는 주로 프랑스 서북쪽에 배치돼 독일군에 맞서 싸웠는데 포터 형제는 육군 52대대(52nd Battalion)에 배속됐다. 프랑스인들은 호주군을 ‘디거(Digger)’로 부르면서 환영했다.   

포터 부부는 1916년 9월 4명 중 아들 3형제가 유럽에서 전사를 했지만 시체를 확인 못한 실종 사망 상태 MIA(Missing in Action)라는 통보를 받았다. 셋째 아들 랄프는 중상을 당해 입원 중이라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다.
1916년 9월 3일 호주군은 프랑스 포지레스(Pozieres) 지역의 농장(Mouquet Farm)에서 독일군과 격전을 치렀다. 독일군은 콩크리트 방어벽과 동굴에 숨어서 방어를 했고 호주군은 진격을 해야 했기에 많은 희생이 따랐다. 포터 3형제도 이 전쟁에서 전사했는데 거의 100년이 지난 2013년 프랑스 농부가 모케(Mouquet) 농장 근처에서 수로 공사를 하다가 많은 사람의 뼈를 발견했다. 이 소식이 호주 정부에 알려졌고 조사를 통해 허티, 에드워드, 토마스 형제의 시신을 찾아냈다. 같은 장소에서 3형제의 시신이 발견됐다. 

랄프는 1년 정도 입원 후 다음해 10월 귀국했다. 어머니 엘리자(68)는 그해 12월 질환으로 사망했다. 세 아들의 전사 소식이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랄프는 1961년 (68세)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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