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오늘의 목적지는 에스뗄라(Estella). 오르막 길이 많은 23km 길이다. 어제 건너온 프엔떼 레이나(Puente De Reina)를 돌아다 보니 멀리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여왕의 다리’라고 불리우는 로마네스크식 유산이 왕관을 쓰고 손을 흔들고 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새벽 날씨는 쌀쌀하다. 치즈와 토마토로 만든 샌드위치와 초리초(Chorizo) 소시지를 먹기 좋게 썰어서 비닐 봉지에 담았다. 일행들과 쉬면서 먹을 오늘의 음식.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비상 식량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며칠 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비옷을 입은 우리는 아침도 거른 채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다음 마을에 아침과 커피를 파는 카페가 있다고 했다. 1시간 30분쯤 지나자 오른쪽에서 고개를 쭉 빼고 서 있던 이정표 하나가 보였다. 

라라소니아(Lalasonia). 남편은 그곳에 들러 아침을 먹자고 했다. 그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른쪽으로 숲을 하나 돌아가면 마을이 보일 수도 있겠지. 앞서 걷던 젊은 그룹이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지않고 계속 걸어갔다. 뒤에서 걷던 순례자들도 그곳을 들르지 않고 우리를 앞서 지나갔다. “다음에 만나는 마을에서 먹으면 어떨까요? 그 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나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은데요”. 일행들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발걸음을 옮기는데 배가 고프다는 남편의 볼멘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길게 펼쳐진 흙 길에 빗줄기가 굵어지자 빗물이 고인 웅덩이들이 생겨났다. 그 위에 빗방울이 퐁당퐁당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초록색 열매를 달고 길가에 늘어선 체리 나무들. 저 푸르고 작은 것들도 때가 되면 붉은 과일이 되겠지. 나무와 태양, 흙과 시간이  빚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 그 속을 걷고 있는 나. 행복했다. 그 때 익지도 않은 푸른 체리를 따서 깨무는 친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눈을 들어 멀리 보아도 푸른 밀밭만 바다처럼 출렁일 뿐, 다음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 빗 속에서 풀을 뜯던 조랑말들이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우리를 향해 길가로 걸어왔다. 나무 담장에 기대어 힘없이 조랑말을 바라보는 남편과 친구들. 그들의 옆모습이 허기져 보였다.  

레몬 맥주가 흔들리고 거품이 급류가 되어 손등 위로 흘러 내린다…처음 만난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만나서 반가와요. 그런데 당신은 순례길을 걷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빗길을 걷던 일행들이 찍어대는 지팡이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데도 도무지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걸어가다 보니 밀밭 너머로 성당의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아. 마을이다. 배고파”. 비는 멈추었고 마을 뒤 편에 커다란 무지개가 보였다. 무지개를 보자 일행들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그러나 쉽게 손을 내밀지 않는 마을. 한 시간을 넘게 걸어 가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키 큰 나무들이 낡은 성당 지붕에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 덩굴 장미가 늘어져 있었다. 5월의 스페인의 붉은 장미 향을 흠흠거릴 여유조차 없이 배가 고픈 일행은 우선 먹을 곳부터 찾았다. 순례길에 접한 작은 마을에는 대부분 간단한 음식을 파는 바(Bar)나 상점들이 있는데 웬일인지 이마저도 보이지가 않았다. 조마조마하며 가게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걷는데 금세 보리밭이 나타났다. 마을이 여기서 끝인가.

남편의 목소리는 분노로 변했다. 아까 그 마을에서 먹고 왔어야 했는데 내 고집 때문에 모두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며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친구들의 표정도 남편의 목소리와 같은 색깔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초리는 싸늘했다. 엊저녁에 앱을 보니 이 마을에 분명 상점이 있었다고 하자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다. 변명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발길을 되돌려 마을에서 물이라도 마시고 가기로 했다. 물배라도 채워보려는 속셈이었다. 마을 초입까지 가서야 녹슨 수도꼭지를 발견했는데 ‘이 물은 마시지 못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달려있었다. 

낡은 집 앞, 허물어져 내린 얕은 담장 위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쉬다 가기라도 하자며 담 위에 앉아서 신발을 벗었다. 남편은 배낭을 내리지도 않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아침에 채워 온 우리들의 물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때 S가 “아. 하하하. 있어.  먹을 것이. 누룽지”. 다섯 명의 손바닥에 주어진 누룽지 한 조각. 입자가 쌀 풀을 쑤어서 부친 것처럼 고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누룽지를 만든 고마운 S. 누룽지를 씹으면서도 그녀는 계속 고개를 돌려 허름한 집을 흘끔거렸다. 그 때 남편과 나의 다투는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8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부부가 낡은 밀짚 모자를 손에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열고 나온 문 뒤로 비를 피해 빽빽하게 서 있는 누런 소들이 보였다. 아마 외양간이 아래 층에 있고 살림집은 위층에 있는 듯 했다. 노인들은 우리를 보고도 반들반들하게 때가 절은   그들의 검은색 작업복처럼 무표정 했다. 일행 중 한명이 그들에게 “올라(Hola). 두 유 해브 커피?”라며 큰소리로 물었다. 아. 얼마나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면 귀도 잘 들릴 것 같지 않은 노인들에게 스페인어도 아닌 영어로 물어 보았을까. 일행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를 사발로 마시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출발할 때부터 계속 그 날의 기억이 떠 올랐다. 머리를 흔든다. 머리 뒤 꼭지 아랫부분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난다. 트라우마가 되었나? 일행은 아마 멀리 간 듯하다. 마네루(Maneru)라고 쓰인 작은 석탑이 밀 밭 가에 쓰러져 누워 있다. 오늘 첫 번째로 만나는 작은 마을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 같지가 않다. 가로수에 걸쳐 앉은 5월의 햇살. 바짝 가지치기를 한 늙은 나무들이 아방가르드 조각품처럼 보인다. 낡은 나무 의자 끝. 두 손을 지팡이 끝에 포갠 채 아침 햇볕을 쬐고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노인. 셜록 홈즈 스타일의 모자를 쓴 노인이 지팡이 위에 얹혀 있던 손을 천천히 들며 "부엔 까미노”를 한다.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훔쳐본 그의 낡은 식탁. 페인트가 벗겨진 현관 문.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서 스페인의 속살을 보는 듯 하다. 왼쪽 편에서 따라오던 아르 강의 물줄기는 멀리 사라져 버린다.

파라솔이 뭉게구름처럼 펼쳐진 카페. 테이블마다 배어 있는 커피 냄새. 햇볕이 달라 붙은 담장. 담장 아래 펼쳐진 바나나 의자에 누워 맥주를 마시는 순례자들. 스페니시인가 아니면 이탈리안? 아침부터 술을 마시니 말이다. 여기저기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잡아당기는 사람들. 발가락에 바셀린을 바르며 일회용 반창고로 조심스럽게 싸 매는 순례자들. 이곳에서는 발과 발가락, 그리고 물집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없어지는지가 대화의 일 순위이다. 

파라솔 아래 앉아 있는 일행들이 보인다. 그들 앞에 놓인 연한 크림색 맥주. 레몬 맥주라고 한다. 배낭을 내리는데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좀 더 쉬었다가 함께 가자 해도 갈 길이 멀다며 파라솔 사이로 새처럼 날라 간다. 오늘 아침부터 분위기가 조금 이상 했다. ‘여왕의 다리’를 떠날 때 우리 부부에게 먼저 가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자기들은 조금 늦게 출발할 거라고 했다. 아침에 만든 음식을 나누어 주려고 하자 괜찮다고 했었다. 아. 무슨 일이지? 생장(St Jean Pied de Port)을 출발해서 걷기 시작한 지가 오늘이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남편은 일행들과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걷기 시작한 지 3일 만인 라라소니아 사건 때부터라고 했다. 그 날이 너무 충격이었다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남편. 

남편 윌리엄은 다 나 때문이라고 했다. 라라소니아를 지나며 겪은 굶주림. 대화 중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면 내 정보가 옳다고 우기는 일.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성격과 나의 잘난 척이 결별의 이유라고 했다. 나에게 모든 문제가 있다고 몰아 부치는 그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번 순례길에서도 우긴 적이 얼마나 많았어? 알잖아”. 일부러 우기려고 한 것은 아니고 내 정보가 옳다고 믿고 말을 했던 것이다.  사실 나중에 틀린 것을 알고 몇 번 사과를 한 기억이 떠 올랐다. 아. 그렇다면 윌리엄이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니. 왜, 여태까지, 한번도 그런 내 모습을 못 보고 살았을까. 머릿속에서 수류탄이 빵 터져 버린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 올 때까지만 해도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인들이 종종 이 길을 떠나려는 이유를 물으면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지금보다 더 근사한 나 자신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이순간, 내 자신에 대한 완벽한 착각과 새롭게 마주친 진정한 나의 모습에서 온 충격이 머릿 속을 휘젓고 있다.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지자 몸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흔들리는 몸을 테이블에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너무 사람에 대해서 판단적(judgemental)이라고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고 나의 의견이라고 했더니 바로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과 걷고 싶어하지 않는 거야”. 나는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빈 맥주잔을 오래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맥주 한 잔을 더 사가지고 내 앞에 놓으며 한 마디를 보탠다.  아침에 S가 한 말이라고 했다. “우리가 따로 가고 싶은 것은 윌리엄 때문은 아니예요. 우린 윌리엄은 좋아해요”. 레몬 맥주가 흔들리고 거품이 급류가 되어 손등 위로 흘러 내린다.  남편을 쏘아보며 손을 씻으러 일어나는데 오른쪽 테이블에 합석 한 두명의 순례자가 서로 이름을 묻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만나서 반가와요. 그런데 당신은 순례길을 걷는 목적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