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국민 무료의료제도인 ‘메디케어(Medicare)'를 도입한 봅 호크(Bob Hawke) 전 총리가 지난 16일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시드니 자택에서 가족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조용히 영면했다고 한다. 

역대 노동당 총리 중 가장 탁월했고 인기도 높았던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창설의 주역이 됐고 환율 정책 변경(고정 환율에서 변동환율로) 등 경제 개혁 조치와 더불어 호주 경제를 국제무대에 등장시켰다.  

그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총선에서 4연속 승리를 이끌어 노동당 최장수 총리로 우뚝섰다. 1975년 11월 11일 노동당 고프 휘틀램 총리(노동당)가 연방 총독(John Kerr)으로부터 해고를 당하는 호주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당시 말콤 프레이저 야당대표가 과도내각 수반으로 총리가 돼 1983년까지 집권했다. 

휘틀램 전 노동당 정부의 지나친 예산 낭비로 예산을 크게 줄이는 것이 새 정부(프레이저 자유당)의 목표였다. 그러나 세계 불황으로 실업자가 크게 늘었고 노조 총파업 후 인건비와 물가가 앙등하는 등 경제가 엉망이 됐다. 은행 이자율도 무려 22%였는데 존 하워드 전 총리가 당시 재무장관이었다. 

특히 전임 정권 때 저소득층에게 무료였던 의료비가 프레이저 정부 시절 수익자 부담으로 바뀌면서 대부분 미국식 의료보험을 들어야만 했다. 그 금액이 큰 부담이 돼 생활에 어려움을 더해 주었다. 

이런 차에 호주노총(ACTU) 위원장을 역임한 노동법 협상 전문가인 봅 호크가 노동당 대표로 전격 영입돼 1983년 총선에서 말콤 프레이저 자유당 정부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호크 총리는 당선 후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의료제도를 도입했다. 근로자들의 수입(급여)에서 1%의 의료비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 국민이 무료의료 제도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이 제도는 지금도 호주의 자부심이며 국민들은 ‘메디케어 무료 의료제도를 고수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의료제도가 의료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의료인들도 정부 정책에 큰 불만 없이 메디케어제도를 유지한다. 

호크 전 총리는 1929년 12월 9일 남호주와 서호주 국경 지역 보더타운(Bordertown)에서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리해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서호주대학(법대 졸업)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해학의 로즈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선발돼 노사관계를 전공했다. 

그는 왜 노동당에 입당했는지에 대한 물음에 “삼촌(알버트 호크)이 서호주의 주총리(노동당)를 지내면서 늘 조카에게 배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가르쳐 그의 영향으로 노동당(18살 때)에 입당했다”고 말했다. 

호크 전 총리는 노조 대표단체의 수장을 역임했지만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노동 지도자의 입장을 버리고 신자본주의 방향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무역을 쉽게 하기 위해 관세를 낮췄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다. 은행을 개방해 외국계 은행들과 경쟁하도록 했고 국유 기업의 민영화를 촉진했다. 노동 시장 개혁과 함께 외국 자본을 대거 유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했다. 

1974년 영국이 국민투표로 영연방경제권을 버리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들은 대외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뉴질랜드는 총리와 장관들이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를 방문해 읍소했지만 영국은 EU에 가입했다. 

호주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환경이 됐다. 그러나 호주는 지정학적으로도 아시아권에 속하지만 영국 독립 후 100여년 백호주의 제도를 채택해 경제적 및 외교적으로 영국과 영연방국가의 틀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호주 초등학교 학생이 런던과 파리 거리를 금방 알아봐도 인도네시아 거리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호크 총리와 후임자인 폴 키팅 총리는 ‘호주도 아시아의 일부’라는 표현으로 대아시아 외교를 적극 권장하며 무관세를 목표로 APEC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1985년 호크 총리는 호요방 중국 공산당 서기를 호주로 초청해 서호주의 철광석 수출 거점인 필바라(Pilbera)를 직접 보여주며 중국의 호주 자원 개발에 불을 당겼다. 

호주는 1980년대  브라질 정도의 경제 수준이었지만 중국과의 교역 증대로  현재 세계 11위 중견 경제국이 됐다. 중국 천안문사태(1989년 4월부터 6월 까지) 당시 호크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중국인 대학생 희생자들을 동정했고 이들에게 사면령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 4만명이 호주에 영구 정착하는 길을 마련했다. 호주의 중국어 신문들이 호크 전 총리의 서거를 크게 보도하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그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호크 전 총리는 호주 경제를 개혁하고 호주를 세계 무대에 등장시킨 진정 탁월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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