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골목을 돌자 광장이 나오고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성당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순례자들의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그라뇽 성당 알베르게. 36명이 둘러 앉은 한 지붕 한 가족 훈훈한 저녁이다.

순례길에서는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 어느 지붕 아래로 찾아 들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낯선 이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방을 나눠 쓰고 잠을 청한다. 누구도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지도 않은 거리, 그 거리에서 우리는 스스럼없이 가족이 되고 또 자연스럽게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나헤라(Najera)에서 출발해 오늘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걸어보기로 한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29km쯤이나 걸었을까. 언덕 위에 아름다운 마을이 보인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라뇽(Granjon) 마을이다. 그라뇽은 리오하(La Rioja) 주에서 레온(Castella y Leon) 자치주로 넘어가는 마지막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향한다. 성당 뒤편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환한 미소로 팔을 벌리고 나를 깊이 안아준다. 따뜻하다. 

내 침대 바로 옆에 누운 털북숭이 순례자와 어정쩡한 동침.

순례자들의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알베르게, 이곳은 어제 들어왔던 순례자가 남겨놓고 간 작은 정성으로 오늘 순례자들의 따뜻한 밥상이 준비된다. 내가 남겨놓고 갈 도네이션은 내일 이곳에 들어올 순례자들의 밥상이 된다. 창문을 밀고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샤워와 빨래를 끝내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례자들. 뜰에서 젖은 잿빛 머리카락을 햇볕에 말리며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키 큰 청년, 쿠키를 입에 물고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는 긴 금발 머리의 여인, 자원봉사자를 도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50대 여인의 쾌활한 웃음소리, 소쿠리에 담긴 양파를 까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20대 그룹. 저녁 7시, 순례자의 배꼽시계가 실내를 가득 채운 음식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낼 무렵 테이블에 차려진 근사한 저녁상. 36명이 둘러앉은 한 지붕 한 가족 훈훈한 저녁이다. 

그라뇽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어제 확인해 두었던 노란 화살표를 따라나선다.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펼쳐진 길, 그러나 오늘은 아침부터 왠지 머릿속이 무겁고 땅으로만 시선이 떨어진다. 3km도 채 걷지 못하고 결국 산 중턱에서 배낭을 내린다. 갑자기 찾아온 공허, 반복되는 일상에 벌써 지쳐버린 걸까? 몸이 탈이 날까 걱정이 되어 마음보다는 몸 상태에 신경 쓰며 걸어왔는데, 조용히 따라와 주던 마음이 오늘따라 변덕을 부리며 신파로 옮겨간다. 그런 나를 다독이며 무심히 땅으로 눈길을 주는데 바로 내 발밑에서 몸이 뒤집혀 발버둥 치고 있는 벌레 한 마리. 언제 순례자의 발길에 짓밟힐지 모를 목숨. 지팡이로 뒤집어주고 다시 일어선다. 

문득 오늘 아침 미하엘이 내 등 뒤에다 대고 한 말이 기억났다. “빅토리아, 길을 걷다가 처음 만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같이하지 않을래? 그곳에서 날 기다려줘!”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박경선생님이 카톡으로 보내온 돌에는 Victoria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계속되는 도로와 산길, 한참을 걷다가 나타난 작은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골목길에 누워 있던 고양이들이 외지인을 보고는 마땅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길을 내준다. 젊은 여인도 사내도 아이의 울음소리도 떠난 마을. 열린 문틈으로 주인을 따라나서지 못한 색 바랜 플라스틱 대야, 빨래 집게, 빈 의자가 빈집을 지키고 있다. 좁은 골목을 돌자 광장이 나오고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거대하게 서 있는 성당. 은색 커트 머리에 청색 스웨터를 입은 노인이 흙 담장을 짚고 지팡이에 의지해 성당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도 노인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늙어버린 신부님, 늙어버린 신자, 어쩌면 그들이 이 거대한 성당을 지키는 마지막 촛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당을 나오는데 제대 앞에 켜져 있던 촛불 하나가 슬며시 꺼진다. 

벨로라도(Belorado) 마을에 들어서니 마켓이 서고 있다. 꽃가게, 옷가게, 과일가게, 소시지 가게, 노점상들이 들어찬 광장의 손님은 주로 지팡이를 든 스페인 노인들이다. 발걸음이 자동으로 천막이 쳐진 옷가게로 향한다. 어제 화장실 거울에서 본 내 몰골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피부가 거칠어진 것은 물론이고 광야로 변한 정수리에서 흰머리가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옷가게가 있는 천막을 기웃거린다. 철사 옷걸이에 걸려 바람을 따라 일렬로 춤을 추고 있는 티셔츠 걸그룹을 지나 중간쯤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을 뽑는다. 숙소에서 입기에 편리할 것 같은 노란 유채꽃이 새겨진 몸빼바지도 집는다. 상․하 15유로를 지불하고 받아 든 옷 봉지, 내게서 꽃내음이 좀 날까.

이제 내려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울 차례다. 광장 앞 카페로 향한다. 주저 없이 에스텔라 맥주를 주문한다. 어느 TV 광고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할아버지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는 그 유명한 스페인 맥주. 처음 한잔은 산티아고 길의 완주를 위해, 브라보! 두 번째 잔은 알바트로스처럼 거대한 날개를 펴고 세상을 날아보기 위한 나를 위해, 또 브라보! 기분이 좋아지며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다시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선다. 뭉게구름을 탄 듯 발걸음이 가볍다. 그러나 오월의 스페인 땅에 내리쬐는 다소 이른 햇볕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마는 바․보․새. 알코올 과다복용으로 골목길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는다. 옷이 담겼던 비닐봉지도 어디서 떨궜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날은 걷는 내내 노란 화살표가 내게 등을 돌리며 숨바꼭질을 했다.  

조그만 마을 아헤스(Ages) 알베르게, 새벽 5시 반, 아직도 어둠 속인 침대에서 배낭과 등산화를 챙겨 불이 켜진 주방으로 나온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 어젯밤 찬기가 있는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잤기 때문인 거 같다. 냄비에 물을 끓여 어제 예비용으로 사둔 미니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올라(Hola) 하고 인사를 건넨다. 내 침대 바로 옆에서 밤새 코를 골며 자던 독일 남자 미하엘이다. 

어제 일찍 알베르게에 도착한 나는 아름다운 빨간 지붕과 나무가 보이는 창가 쪽에 침대를 배정받고 기분이 좋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덩치가 산만 한 털북숭이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내 침대와 바싹 붙은 빈 침대에 배낭을 내리는 것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배정해 주는 대로 침대를 사용하는 것이 규칙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를 보는 순간 복잡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를 외면하며 공간을 사용하려니 제약이 따랐다. 그가 침대에 앉을 때마다 함께 출렁이는 내 침대, 그가 던져놓은 수건과 침낭 일부가 내 베드 쪽으로 넘어온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파워포인트도 그의 머리맡에 있어 그를 벽 삼아 묵언 수행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핸드폰 충전기를 들고 어정쩡하게 파워포인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선뜻 자신의 핸드폰 줄을 빼고 내 핸드폰을 바꿔 꽂아준다. 핸드폰이 충전되는 동안 가능한 그와 거리를 두고 침대 끝에 누워 쉬고 있는데 그도 털썩 침대에 드러눕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동침. 나는 침대 모서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침대 기둥을 꽉 부여잡는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바(Bar)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가 보인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뭔가를 적고 있다.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자 반가워하며 앉으라고 의자를 내주더니 어느새 하얀 거품이 일렁이는 커다란 맥주잔 하나를 내 앞에 놓는다. 그 후 어떻게 그와 가까워졌는지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맥주잔이 비워질 무렵 내가 그린 그림일기 수첩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그림 이야기,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서며 아쉬움에 핸드폰을 꺼내 인증 샷까지 찍고야 마는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그렇게 싫었던 그가 그림 한 장으로 어느새 ‘오만과 편견’의 남자 주인공, 미스터 다시(Mr. Darcy)로 변신해 있었다. 

온 종일 우비를 쓰고 걷는 길, 오후 3시나 되었을까. 몸이 으슬으슬 찬기가 느껴져 카페에 들어갔다. 크로아상과 콘레체를 마시며 핸드폰을 켜는데 박경 선생님으로부터 사진 한 장이 들어와 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보내온 돌, 하트 모양의 돌에 Victoria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 이름, 빅토리아.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떠난 어느 순례자의 사랑 고백일까? 문득 오늘 아침 미하엘이 내 등 뒤에다 대고 한 말이 기억났다. “빅토리아, 길을 걷다가 처음 만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같이하지 않을래? 그곳에서 날 기다려줘!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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