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평가>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평가가 확대 되기도 하고 축소 되기도 한다. 그들의 행적이 오늘 날 우리들의 안목으로 평가된다. 이 평가는 고정적일 수도 없고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기준과 접근 방법이었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적 인물들이 영향을 받는다. 삼국 시대는 상무정신이 중심된 가치관이었다. 삼국 통일과 북방 민족과 대립을 위한 가치관이었다. 상무정신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사정이 달라졌다. 외침의 우려가 없는 가운데서 내치를 위주로 했다. 유교가 통치이념이었기 때문에 퇴계와 율곡같은 대학자들을 배출했다. 충, 효 사상을 이루어 ‘충의 열사’들을 배출해 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동태론적 접근(Behavioristic approach)을 통해 다시 분석,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순신과 원균은 외침을 맞아 싸운 ‘충’의 무장이었다. 

이순신

<이순신>
이순신은 1576년에 32살에 무과에 합격한 뒤 함경도에 가서 북방 오랑캐를 막는 일을 했다. 소대장 격인 그는 여진족과 전투가 일어나면 항상 앞서 싸우지 않고 병사들 뒷편에 있었다. 그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해 미관 말직에만 머물러 있다가 40대 중반에 정읍 현감이 되었다. 유성룡이 하회 고향에 왔다가 유치숙의 진 모습을 본다. 좌의정 유성룡이 자기와 젊어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무난한 이순신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라는 높은 관직을 갑자기 받았다. 이순신은 여수에 부임하여 군기를 다지고 나무를 실어와 배를 만들고 군사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의 도움을 청했다. 이순신은 편의종사(便宜從事)의 권한을 무시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리고 기다렸다. 장군은 조정의 허락 없이 서로 협동하는 권한이 있다. 이순신은 5월 2일에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거북선

<원균>
1567년에 24살에 무과에 합격한 뒤 용장으로 여진족과 싸울때 항상제일 앞장서는 용장이었다. 북쪽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부사라는 높은 관직을 얻었다. 빠른 출세 길을 달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였다. 자기 보다 나이도 다섯살이 밑이고 무과급제는 한참 후배이고 자기 보다 워낙 관직이 낮았던 이순신이 자기 보다 한 계급 위인 전라좌수사가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원균은 심한 불만을 갖게 된다. 

술좌석 등에서 이순신이 유성룡 대감의 빽으로 낙하산 인사로 벼락 출세한 별 볼일 없는 인물이라고 틈만 나면 비난했다. 보통 사람이면 어느 시대라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이순신도 그가 자기를 그렇게 평하는 걸 전해 듣고 알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만 안 보였을 뿐이었다. 소심한 사람들은 결단을 못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걸 잘 못한다. 호주 동포 사회에서도 자기 주장을 잘 안하고 조용히 있는 소심한 사람을 인격자라고 평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임진왜란을 앞 두고 두 명은 남해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진에 부임하여 해이해진 군기도 못 잡았다. 3개월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는 경상우수영으로 왜군이 몰려 왔다. 수백 척의 배에 잘 훈련된 왜군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쳐 들어 왔다. 원균의 부대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왜군은 희생도 없이 상륙하여 부산진영을 유린했다.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이순신에게 원조를 청했다.

원균

<무시한 편의종사>
영남 관찰사의 공문을 보면 “왜적 350 척이 벌써 부산 앞 절영도에 와 있다.(4월 15일 협조 요청 공문) 부산진이 벌써 함락되었다.(4월 16일자 공문) “왜적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무인지경으로 몰아치고 있다.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후원해 달라.”(4월 20일자)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정으로부터 출전명령을 받고서야 경상의 수영과 연합작전을 세웠고 그로부터 며칠 뒤 싸움이 있었다. 왜적의 주력 부대는 이미 서울을 육박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신의 연합 부대는 후속 부대와 전투를 한 것이다.

후방 부대와 전투에서 연전 연승으로 승리한 연합부대는 왜군의 통로를 막는데 성공했다. 위기상황에서 20일 만에 참전한 것은 보신책이었다. 원균이 연명으로 전과를 올리려 했으나 이순신은 단독으로 자기만의 전과를 조정에 올렸다. 원균은 가선대부, 이순신은 한 급 높은 자헌대부가 됐다. 서열의식이 강한 원균에게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해군참모총장 격인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원균의 모함 시작>
드디어 원균은 후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원균의 불만이 쌓여 모함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것이 원균이 역사의 악인이 된 계기였다. 두 장군이 한 바다에서 왜적을 공동으로 막고 있었다. 이들 불화가 심해지자 원균은 충청병사로 발령받는다. 원균이 세 번 째 당하는 수모였다

여기서부터 원균은 요로요소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1597년 조정은 왜와 화의를 벌이다가 깨어지고 만다. 소서행장은 화의파였고 가등청정은 주전파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서행장은 이순신에게 가등청정이 혼자 배 한 척으로 조선을 정탐하니까 잡으라고 했다. 소심한 이순신은 왜의 모략일 거라며 출정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큰 실수였다. 소서행장의 말이 사실이었다. 만약 이 때 가등청정을 잡았으면 정유재란은 안 일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로 이순신은 파직되어 서울로 잡혀왔다. 원균은 열망하던 3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순신은 권율 장군 휘하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모친상을 당한 그는 상복을 입은채 육군 졸병으로 아무말 없이 행군을 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원균 때문에 훌륭한 장군이 저렇게 되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왜적이 6백 척으로 다시 몰려 왔다. 정유재란 시작이다.

원균은 전선의 약함을 이유로 수륙 양면전을 주장했다. 같은 유성룡 파인 지금의 국방장관 같은 지위에 있는 권율은 이순신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권율은 “장군이 전쟁에서 목숨을 아까워 한다”며 명령 불복종으로 원균을 곤장 5대 벌에 처한다. 다시 출전 명령을 받고 나갔다가 원균은 죽임을 당한다. 58세의 뚱뚱한 원균은 곤장 매독으로 뛰지를 못하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왜군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다시 통제사 자리는 이순신에게 돌아갔다. 원래 패군지장은 할말이 없는 법이다(有口無言). 당시 사관은 “원균은 사람됨이 포악하고 이순신에게 온갖 모략을 하여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았다. 그는 전쟁에 패하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사졸들로 하여금 고기 밥(魚肉)이 되게 한 죄인이다”라고 적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왜군은 물러가고 있었다. 그는 퇴로를 막고 명나라 군과 연합하여 승전을 했다. 당시 사관은 “소서행장은 순천성을 굳게 지키고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군과 바다 입구를 막고 압박하였다. 소서행장이 사천의 왜장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왜적이 수로를 따라 오니 이순신이 진격하여 크게 깨트리고 적의 배 200 여 척을 불사르고 죽이고 빼앗은 것이 무수하였다. 이순신은 화살과 총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선조 31년 11월초)

<용장과 겁장>
이순신은 물러가는 적과 싸우다 죽었다. 앞장 안 서던 그가 일생 처음으로 뱃머리에서 지휘하다가 총에 맞았다. 이를 두고 논자들은 자살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중상모략에 휘말리느니 명예를 택했다. 죽는 장면이 이 둘은 명장과 패장, 용장과 겁쟁이 됐다. 임진왜란의 공신 녹훈 논란은 3년 8개월을 끌었다. 가문의 명예와 자손들에게 커다란 혜택이 따른다.
원균이 2 등 공신으로 녹훈을 올리자 선조는 말했다. “전쟁이 났을 때 원조를 청했으나 이순신이 안달려갔다. 원균은 모든 전쟁에서 언제나 앞장 섰다. 적의 장수를 목 베어 새운 공까지 이순신에게로 돌아갔다. 두 세 번 장계를 올려 해전은 불리함을 호소했으나 곤장만 맞았다. 원균은 죽을 걸 뻔히 알면서 몸을 나라에 바친 사람이다. 원균은 훌륭한 장수였 1 등 공신으로 하라” 권율, 이순신 다음에 원균이 합세했다.

오랜 왕국이 왜적에게 유린된 건 엄연한 사실이다. 왜적은 자기네 국내 사정이 있어 물러 갔다(풍신수길의 사망) 인간은 실수도 있고 약점도 있다. 이 걸 제시해야 한다. 어떤 인물을 지나치게 미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과장에서 그런 위인에겐 악역이 필요하다
그래서 악인은 더 과장되어 악인화되어진다. 이순신 장군이 명장임은 틀림없다. 그를 격하시키거나 원균의 오명을 벗기는 수준을 벗어나 재평가돼야 한다. 원균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대립됐다. 원균도 이순신을 미워했지만 이순신도 그를 미워했다. 난중일기에서 무지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원균은 적극적으로 모함했고 이순신은 위선을 했다. 임진왜란이 이순신 힘으로 물리쳤단 생각은 어떤가?

<군사정권이 필요했던 인물>
박정희 육군 소장이 5. 16 쿠데타를 성공한 후 무장으로 구국 영웅의 선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박정희 군사정부에 선택되어 현충사도 짓고 광화문 네 거리에 동상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한글학회 학자들은 광화문 네 거리에 동상이 처음 세워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세종대왕이라고 주장했다. 한글학회 탄원서도 무시된 채 이순신 동상이 건립됐다. 군사정권의 영웅주의 가치관과 필요성이 반영되었다.

반세기 이상 걸려 세종대왕 동상도 뒤편에 건립됐다. 어떤 인물을 연구하던지 객관성이 결여되어선 안 된다. 현실적 목적으로 어떤 인물이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이순신은 도덕적이지만 원균에 비해 결단력이나 용기가 부족했다. 명예나 욕심이 많은 원균같은 인물도 그 것이 동기가 되어 역사상 큰 일을 해내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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