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 사유>
동양에서 덕(德)은 인물 평가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왕도 덕치(德治)에서 벗어나면 용군(庸君)이 된다. 조선 왕조에서 폭군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그러나 광해군의 입장은 연산군과 다르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죄목이 세 가지였다.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킨 일.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고 혼탁한 정치를 한 일. 명나라에게 사대를 안 하고 친 청나라 정책을 편 일이었다. 광해군의 자주, 실리 외교가 사대파에게 밀려난 것이다.

157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광해군은 세자에 봉해졌다. 광해는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였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가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에게 제일 아쉬운 점은 모후와 일찍 사별이라고 했다. 

<종계변무사>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선조는 기뻐했다.(종계변무 – 태조 이성계에 관련된 명나라 역사를 고친 일) 선조는 왕자들도 광국원종 공신 1등에 책록하였다. 1584년 선조는 주청사를 임명하면서 "모든 게 너희 역관들 때문이다. 빈손으로 오면 네놈들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줄 테다"란 최후 통첩을 내렸다. 이 일행이 조선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숙종 때 편찬된 유명한 역관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官志)’에 기록됐다. 1583년 역관 홍순언이 명종 때 명나라에 사행을 갔다. 통주란 곳에서 홍등가에 아름다운 소복 기녀의 사연을 듣고 도와준다. 역병으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비용을 도와준다.

홍순언은 공금 횡령으로 투옥되고 만다. 그리고 1584년, 주청사를 보내며 수석 통역관 자리를 맡겼다. 그 여인은 이후 예부 시랑 석성의 후처가 됐다. 석성은 자기 처가 조선인에게 도움을 받은 얘길 들었다. 그는 역관을 집에 초대하여 부인이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석성의 노력으로 이성계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기록이 고쳐진다.  

<현군 광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했다. 그때 광해는 군량미를 모으고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공을 세웠다. 왜란에 선조는 신의주로 쫓겨가고 광해가 왕 대역을 했다. 광해는 난중에 동분서주 소임을 다했고 조야의 명망을 모았다. 그는 현군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부왕 선조는 그 보고를 받고 인정과 칭찬은 커녕 오히려 견제와 냉대만 했다. 

이 와중에 1606년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았다. 선조는 태어난 영창대군을 총애하고 세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자 광해군에게 선위 유지를 내렸다. 신하들에게는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교를 내렸다. 영의정 유영경이 광해군과 사이가 나빠 유교를 감추었으나. 이일은 이이첨, 정인홍 등에 의해 누설된다. 

광해는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오르자 유경영의 소북파가 정인홍의 대북파에게 궁지에 몰렸다. 인목왕후는 대비로서 교지를 내려 광해군이 즉위했다. 광해가 1608년 즉위하고 유영경은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는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가 득세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광해는 조정의 기풍을 일신하고 초당파적 인재를 등용하고 임진왜란으로 파탄난 재정과 불탄 궁궐을 중수했다. 조세를 공평하게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고 후금과 실리외교를 펼쳤다. 

당시 욱일승천하는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광해는 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똑바로 읽었다. 그러나 이복 형인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낱낱이 비방하고 다녔다

<인목대비의 원한>
한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도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에 임해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일러바쳤다. 대북파가 주동하여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했다가 사약을 내린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인목대비와 아버지 김제남은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영창을 추대하며 반역도모를 했다. 이에 영창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조치가 되었다

이듬해 강화부사 정향 자의로 영창은 증살되었다. 영창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다. 자식과 아버지를 잃은 인목대비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광해군을 헐뜯고 원망하는 일만 하고 살았다

권신들이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광해가 응하질 않았다. 광해군은 5년을 참았다가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정인홍은 전은론(全恩論)을 주장(부모는 형벌 불가능)했다. 효가 기본인 사회에선 생모가 아니라도 사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폐모의 조처를 한 것이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왕권 확립을 위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게 필수였다. 인륜에 어긋나는 조치는 선례가 많았다.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세조는 형제와 조카를 죽였다. 인조도 숙부와 아들, 며느리를 죽였다. 

<욱일승천하는 청나라>
광해는 전국을 돌면서 조선의 국력을 체험, 평가했다. 명나라의 양식, 물자, 노역 공급과정에서 명의 횡포를 목격하였다. 그에겐 왜군보다 명나라 군의 피해가 더 크게 느껴졌다. 광해는 여진족을 주시했으나 대신들은 명나라에 보은사상만 갖고 있었다. 광해는 정탐꾼을 통해 금나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1617년 명은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의 원병을 요구한다. 광해군은 “반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또 “우리 군대는 훈련이 부족하고 무기도 없다”고 했다. 

1618년 7월 명의 거듭된 강요에 군대 파견을 결정한다.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 3천 여명이 갔다. 광해는 3만 군사로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강홍립에겐 저 유명한 관형향배(觀形向背) 밀지를 내렸다. “형세를 보아 유리하게 행동하라”는 내용이었다. 강홍립은 명에게 “군량미가 뒤 처졌다”며 머뭇거렸다. 그는 통역을 보내 후금과 내통하기도 하였다. 명의 독촉에 못 이겨 나가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했다.

청나라에 “우리는 마지 못해 출정에 나섰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평안 감사 박엽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다. 투항한 장수의 가족을 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대기하였다. 조정은 강홍립의 죄를 논하고 명의 은의를 따지고 있다. 이때 강홍립은 적진의 사정을 몰래 조정에 보고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역적 강홍립을 죽이고 명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처음으로 자기 마음을 실토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건가? 우리 병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지난번 명에서 청병해 왔을 때 경들은 마치 북 한번 울리면 청을 싹 쓸어 버릴 것처럼 말했다. 내 이를 두려워 밤낮으로 고민했다. 경들은 어찌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항한 장수를 명에게 일러 바치려고만 하니 내가 이를 절통해 하노라”고 말했다.

왕은 국제정세를 읽는데 신하들은 능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왕은 국내에서 성(城)을 보수하고 강한 군대를 키워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했다. 인재 등용과 둔전을 개간하여 백성의 걱정을 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왕의 형안은 무지한 신하들 때문에 고군분투한다. 조정은 광해의 정책에 반대를 거듭하고 왕비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왕은 후금과 우호를 다지면서 명에게 적당히 대처했다. 

<인조반정>
서인 반역세력이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성공 가능성도 낮았고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렸지만, 나름 명분이 있었고 민생만은 안정을 찾았던 쿠데타였다. 연산군을 내버려뒀다가는 나라가 망할 거라고 대신들이 확신하고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능양군의 개인적 원한과 당리당략적인 이해 요소도 있었다.

능양군은 추대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칼을 갈며 주도하였다. 아버지가 책봉의사가 있기도 했던 신성군의 동생이었기에 정치적으로 반정의 명분을 얻기 쉬웠던 것이다. 연산군 때는 내각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군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편인 대북 전체가 공공의 적이었다.

인조 반정은 서인들이 대북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대북파는 몰락하여 힘을 못 쓰게 되었다.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이서와 이귀, 김자점, 최명길, 최내길 형제가 동조했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반군은 2,000여 명의 군사로 창의문으로 진격했다. 

성문을 부수고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써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명분은 민생에 있어 혼군 척결이었다. 

광해군에게 씌워진 죄목은 사대를 저버린 배반죄였다. 나라가 짓밟히면서 존명사대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조정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명분만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광해는 대비책을 세우기에 골몰했다. 내치(內治)에도 어느 군왕 보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후 환도했을 때 궁궐은 다 불타고 없었다. 왕실은 월산군의 사저를 왕궁으로 빌려 쓰고 있었다.

경복궁을 비롯 큰 토목공사는 거의 광해군 때 이뤄졌다. 이런 과정에서 부역이 가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광해가 즉위하자 곧 시작한 것이 대동법 실시였다. 대납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모리배들이 이권화 하였다.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쌀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광해 시절 문화사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의보감을 간행했다. 삼강행실도를 보급, 타락하는 기풍을 쇄신하였다. 성곽의 강화로 외침에 대비하였다. 

이런 공적은 그가 쫓겨난 뒤 죄목으로 씌워졌거나 무시당했다. 지주와 벼슬아치의 불만으로 반대세력으로 키운 결과가 되었다. 서얼과 노비출신의 인재등용은 양반 출신을 실망시켰다. 조카 인조에게 쫓겨났을 때 왕비 유씨가 질문했다. “이 일이 종묘사직과 부귀영화 중 어느 쪽이 목적이냐?”

광해군, 폐비 유씨, 폐세자 질은 위리안치(강화도)되었다. 서울 가까이 두고 감시하면서 후환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리안치 두 달 만에 폐세자가 담 밑 구멍을 파고 탈출하다가 잡혔다. 손에는 은과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서한이 있었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이 걸 보고 있다가 떨어져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메어 자살했다.

인목대비가 광해를 죽이려고 하나 이원익 등이 말렸다. 인목대비는 폐 세자에게 주검을 명해 목매어 죽었다. 광해는 쫓겨 난지 두 달 만에 20대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다음해 10월 폐비 윤씨도 심화병으로 죽었다. 박씨에게 시집간 딸을 빼곤 광해는 외톨이가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36년 병자호란에도 교동에 안치하고 경기수사에게 “알아서 선처 하시오” 했으나 그가 광해를 보호하였다. 

다음 해에는 광해를 멀리 제주도로 보냈다. 그를 데리고 다니는 상장이 상방에 광해는 아래채에 잠을 재워도 입을 다물었고 “영감”이라고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오랜 침묵은 무얼 뜻하는지 해석이 분분하다. 귀양 19년 만에 광해는 67세로 제주에서 죽었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어머니 옆에 묻어 달라”였다. 그는 유언대로 양주의 자기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다. 임해군의 묘도 옆에 있으나 후손들은 광해를 무시한다. 광해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세자책봉, 왕위 계승에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라 다녔다.

아버지 선조의 잘못이었고 형제들에게 왕위를 위협당했다. 이런 음모와 술수 속에서 그에게는 정서불안의 결함이 생겼다. 그러나 광해군은 늘 개혁과 혁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치도의 이론 제공자는 정인홍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용병자위설로 우리가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부패한 관리를 척결했다. 정인홍은 청나라와도 중립의 실리외교를 주장했다. 광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군주였고 혁신정치를 폈다. 

광해의 반대파 서인은 그의 모든 공적을 헐뜯고 매도하였다. 인목대비는 “광해가 선조를 독살했다”고 터무니 없는 날조도 했다. 세금이나 노동을 차출할 때 부패한 관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산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광해군 때의 권세가였던 정인홍, 이이첨, 유희분을 비롯,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었다. 반정 모의를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 고령자는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1689년 송시열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을 받았다. 

인조반정의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다.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배청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조선은 당한다. 1627년 후금은 대거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이 때 왕은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한 채 강화도로 도망갔다. 결국 조선은 강제로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굴복했다. 이후에도 국제정세를 못 읽는 인조는 도망온 명의 장수는 돕고 청의 사신은 죽이려 하고 청나라 황제는 오랑캐라고 인정을 안 했다. 

1636년 드디어 청의 전면적 침공을 당하게 된다. 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아무런 대책을 못 세우고 있었다. 끝내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9번 절하면서 예를 행하고 군신관계를 맺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이었다. 

당시 이귀, 장유, 최명길 등은 실리 외교를 주장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그는 청나라의 국력과 당시 국제 정세를 읽고 조선의 친청정책과 서양문물울 받아들여 개혁을 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는 서양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는 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다. 1645년 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조는 서양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 박대했다. 소현세자는 1644년에 청에서 석방되어 3개월에 걸쳐 귀국하였다. 9 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4월 26일 갑자기 죽는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귀비가 의원을 시켜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파다했다.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1645년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인조는 아들을 폐위시키고 '폐세자'라 불렀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후궁 조귀인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이 자기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첫째 석철은 12살, 둘째 석린은 8살,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1648년 장독으로 죽었다. 둘째 석린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석견은 효종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진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에 청나라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다. 소현은 황제 청태종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다 봉림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과 함께 갈 수 있길 원했다.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이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던졌다. 이때 인조가 '용연석'이라고 외친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청나라에 잡혀간 50만명(당시 조선인구 1천만)의 처녀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환향녀(還鄕女)가 되어 돌아 왔는데 주위에서 몸을 오랑캐에게 더럽혔다고 냉대를 했다. 그들은 청나라에 잡혀갈 때 한번 죽고 고향에 돌아와서 두번 죽는다. 그들은 고향에 들어 가기 전에 관헌의 감시하에 냇물에 몸을 씻고 들어가야 했다. 

그 때부터 서방질하는 바람난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 되다가 못 된 것이 신숙주이고 콩나물 되다 못 된 것이 숙주나물이고 조광조를 모략한 심곤과 남정이 이름에서 곤정(곤쟁)이 젓이 나왔다.

<나가며>
역사 인물을 오늘 날 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중요하다.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 당대의 가치기준, 이념 조작으로 쉽게 왜곡되고 기록된다. 그 실상을 접근해 보기 위해 동태론적 접근을 한다. 새로운 역사 경험을 하기 위해 그 작업을 해야 한다(참고: 이이화저 인물 한국사). 

나는 개인적으로 선조나 인조처럼 자기보다 잘난 아들을 몰라보고 질시만 하던 선조나 인조 같은 무능하고 옹졸한 인물들을 싫어한다. 동양에서 덕은 인물 평가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덕이 있는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위선을 하고 사람들은 그 위선에 속고 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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