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현재를 살지만 그 현재는 어느 새 과거가 되어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점점 의식의 밑바닥에 내려앉게 된다. 그 과거사들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이런저런 영향을 주게 되지만 대개는 뚜렷이 호출되는 일 없이 삭제되는 길을 걷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렇게 잊힌 어떤 과거가 현재의 기억 범위 안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 사라진 기억의 돌출이 지금의 나를 기쁘게도 하고 아프게도 한다. 그것이 사랑의 기억, 그것도 첫사랑의 기억이라면! 

재미 작가 정찬열의 현재에도 아득한 기억의 심층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첫사랑의 시간이 불려나왔다. 한국인들이 많이 정착해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가든 그로브의 어느 음식점에서다. 어느 나라건 비슷한데, 한국인 이민자들을 상대하는 곳은 대개 한국적이다 못해 토속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를 되살려 놓곤 한다. 고국을 떠날 때보다 더 낡고 오래된 멋을 내는 조형물들이 그곳에 있다. 한인들은 신기하게도 그것들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고향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절로 갖게 된다. 

식당 벽에 걸린 크고작은 박 바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추억에 젖을 수 있는 이들이 이민자들이다. 거기서 정말 오래된 첫 사랑을 그림처럼 선명히 기억해내는 것도 이들이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려는 소녀가 있었고, 그것을 도우려는 소년이 있었고, 그 알 수 없는 설렘이 물동이를 떨어뜨리게 만들었고, 물을 뒤집어쓴 소녀의 몸매가 드러나고 있었고, 그렇게 맺어가던 사랑을 어쩔 줄 모르는 소년 소녀의 일렁임이 이어졌고....이 수필은 이렇게, 아득한 첫 사랑의 추억을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묘사함으로써 빛을 발한다. 

정찬열(Simon Jung)은 1948년 전남 영암 출생으로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84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보험 관련 일을 해오면서 20년 이상 한국학교를 운영했고 현재는 한인들을 위한 다양한 인문 강좌를 열고 있다. 1999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중」으로 등단,  2002년부터 4년여 동안 한국의 광주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했고 그 글을 모아 2006년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를 발간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수필을 쓰게 되었다. 

조국 통일에 관심이 많아 2005년 LA 평통위원 방문단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9년 통일을 기원하며 걸어서 국토를 종단했고 그 체험을 책 <내 땅, 내 발로 걷는다>에 담았다. 

또 2011년 한국에 와서 국토를 횡단한 이야기를 <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에, 이어 2013년 아내와 함께 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를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에 그리고 2014년 다시 방문한 북한에서의 21일간 여행기를 <북녘에서 21일>에 담아 출간했다. 
- 박덕규(단국대 교수)

 

재미 작가 정찬열.

첫 사랑 풍경 / 정찬열

모처럼 가족과 함께 가든 글로브 한국 음식점에 갔다. 식당 벽에 크고 작은 바가지가 여럿 걸려 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오랜만에 보면서 고향 집에 온 듯 포근했다. 아이들이 저게 뭐냐고 물어서 호박처럼 씨를 심어 기르는 것인데 저렇게 바가지를 만들어 쓴다고 설명해주었다. 내친 김에 흥부와 놀부 얘기까지 해주었다. 신기한 듯 아이들이 바가지를 자주 쳐다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지만 바가지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텃밭에 심어 놓은 박 넝쿨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던 풍경이 스쳐갔다. 저녁이면 이슬을 맞으며 헛간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피어나던 박꽃들, 애잔하던 그 꽃이 열매를 맺어 하루가 다르게 둥글둥글 몸매를 키워가던 모습, 그리고 지붕 위 여기저기 나뒹굴던 박덩이가 생각났다. 잘 익은 둥근 박이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허옇게 번들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 큰 처녀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엉덩짝을 내놓고 누워 있다는 생각이 들던 일도 떠올랐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잘 익은 박을 골라 따내던 날이며, 박에 금을 그은 다음 톱으로 조심조심 선을 따라 박을 타던 일, 박속을 숟가락으로 긁어내어 된장을 버무려 박나물을 만드시던 할머니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어머니가 바가지로 솥 밑바닥을 훑어낼 때 들리던 그 보드라운 소리도 귓전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바가지를 생각하면 고향의 공동 우물터가 떠오른다. 100여 가구 되는 우리 마을은 동네 앞 논 가운데 공동 우물이 있었다. 온 마을 사람이 그 샘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은 주로 어머니나 누나들의 몫이었다. 도시에 가보면 남자들이 물 지게로 물을 길어 나르던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마을은 물 길어오는 일을 여자가 도맡아 했다. 물동이는 물을 나르는 중요한 도구였다. 옹기로 된 동이도 있었으나 대부분 가벼운 양철동이를 사용했다.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 표지

해질 녘에 이웃 집 누님을 따라 우물에 가곤 했다. 밥 때가 되면 우물이 붐볐다. 누님은 동이에 남실남실 물을 퍼 담았다. 그런 다음 물이 출렁거려 넘치지 않도록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어 띄웠다. 고개를 뒤로 젖혀 긴 머리채를 흔들어 손으로 싸매어 뒤로 모은 다음, 머리 위에 또아리를 얹어 얼굴 앞으로 내려온 끈을 입술로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물동이를 이었다. 

한 손으로 물동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물동이 가장자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쭈욱 훑어내어 흩뿌리며 걸어갔다. 누나가 걸을 때마다 바가지가 물동이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투둥 툭, 투둥 툭’ 소리를 냈다. 석양에 긴 그림자를 만들며 물동이를 이고 잰 걸음을 걷는 누나의 자태를 보면서 내 가슴은 쿵쿵 뛰었다. 왜 그리 가슴이 뛰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쯤의 일이다. 어느 날, 허리에 책보를 질끈 매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동네 형이 내게 자그마한 쪽지를 주며 물동이를 이고 걸어오는 동네 누나를 가리키며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무개 형이 전해달라고 하더라며 그 누나에게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아, 편지를 받은 순간 발갛게 달아오르던 누나의 얼굴, 그리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표정이라니.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는 얼떨떨하고 미안했다. 심부름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한동안 안절부절 못했다. 

중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시어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 물결치고 농촌에서 4H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농사 일에 바빴지만 저녁이면 남녀 젊은이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회의를 하고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논에 물꼬를 살피고 오는 길이라 삽을 어깨에 메고 공동 우물 부근을 지나갈 때였다. 저녁을 준비하기엔 이른 시간이었을까. 우물에서 한 아가씨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 성싶었다. 

“도와줄까?” 

내가 묻자, 그녀가 어색한 듯 부끄러운 듯 싱긋 웃었다. 푸성귀를 씻어 담은 제법 무거워 보이는 대바구니와 물동이가 있었다. 내가 샘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또아리를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입으로 또아리 끈을 물었다. 내가 양동이를 불끈 들어 머리 위에 올려주려는 순간, 물동이가 출렁거리며 물이 쏟아졌다.

“오~매, 으째야쓰까 잉!” 

통일을 기원하며 걸어서 국토를 종단한 체험을 책 <내 땅, 내 발로 걷는다>에 담았다.

물벼락을 맞은 그녀가 소리쳤다. 얇은 옷이 물에 젖어 몸의 굴곡이 환히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스런 빛이 스쳤다. 나도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처했다. 나는 얼른 바구니를 들어 옆구리에 안겨주었다. 한 손은 물동이를 잡고 한 손은 대바구니를 안고 아가씨는 총총걸음으로 휘어진 골목을 따라 사라져갔다.  

그 후, 아가씨가 나를 만나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나절, 밭 일을 마친 다음 지게를 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물동이를 이고 오는 그녀와 고샅길에서 딱 마주쳤다. 사람 하나 비켜가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길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홍당무가 된 얼굴, 그리고 어찌할 줄 몰라하던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어릴 적 편지를 전해주었던 그 누나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그때 그 누나의 표정과 저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 사랑의 얼굴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서 있다가 내가 옆으로 비켜서며 틈을 내주자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며 바삐 걸어갔다. 걸어가는 그녀의 물동이에서 ‘투둥 툭, 투둥 툭’ 바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둥 툭, 바가지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가 내 가슴을 가만가만 때리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 어디서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밭에서 김을 매는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왔고, 동네 공동 우물터에서 빨래를 하거나 물을 긷느라 많은 여자와 함께 있어도 그녀는 단박에 내 눈에 띄었다. 4H 회의 때면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아 미소를 담은 눈으로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넌지시 나를 건너다보았다. 내가 눈길을 보내면 앳되고 싱싱한 볼이 살짝 붉어지곤 했다. 

어느 겨울날 저녁, 동네 뒷산 김씨네 산소 앞에서 만나기로 그녀와 약속을 했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려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짧던 겨울 해가 그 날은 유난히도 천천히 졌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시각, 누가 볼까봐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약속 장소에 나갔다. 이를테면 첫 데이트였다.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묘 앞 상석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추운 탓이었을까. 대화는 커녕 무슨 말인가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어주지가 않았다.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또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석으로부터 찬 기운이 온몸으로 번져왔다. 눈 바람치는 캄캄한 밤, 얼음장같은 돌 위에 앉아 오돌오돌 한참을 떨며 앉아 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4년간 농사를 짓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와의 관계는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돌아왔던’ 그날 저녁 풍경을 떠올리면 잔잔한 웃음이 피어오르곤 한다.

코리아 타운 식당 벽에 옹기종기 걸려 있던 바가지들을 다시 생각한다. 밤이면 달빛 아래 둘러앉아 초가지붕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하얀 박꽃들이 보이고, 박꽃처럼 순박하고 깨끗한 첫 사랑 아가씨의 웃음을 떠올리게 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투둥 툭, 투둥 툭’ 물동이 속에 부딪치던 그 바가지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식당의 바가지들이 오랫동안 남아있어, 낯선 땅에서 이민생활을 꾸려가는 한인들에게 가난했지만 정답고 사랑스럽던 고향의 아련한 추억들을 되살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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