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침대로 올라가 맞닥뜨린 예수님의 초상화. “엄마야!”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카리온(Carrion) 산타 마리아 성당 알베르게, 순례자들이 무릎과 무릎을 붙이고 수녀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딸과 함께 온 순례자, 퇴직하고 온 순례자, 갑자기 청력을 잃고 온 순례자, 작년에 죽은 이모를 대신해 왔다는 순례자. 수녀님이 기타반주를 하며 왼쪽에 앉아있는 한 청년에게 미소를 던지며 묻는다. 

“당신은 왜 이 길을 걷고 있나요?” “취업을 앞두고 마음을 다져보고 싶어 왔어요.” 청년이 대답한다. 다시 수녀님의 기타 연주가 이어지고 이번에는 오른쪽 서양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있는 아시아 여자, 나에게 윙크를 보낸다. “당신은요?” 

산타 마리아 성당 알베르게. 순례자들이 무릎과 무릎을 붙이고 수녀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온 털보 순례자가 수녀님의 기타를 받아들더니 클래식 연주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듣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집에 놓인 액자 속에서나 가끔 스치고 지나가던 내 젊은 날들이 기타 줄에 튕겨져 지금의 내 모습으로 오버랩 된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쓴웃음. 슬며시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광장 앞 플라타너스 아래 나무 벤치에 앉아 거리를 바라본다. 도로 갓길에서 키 큰 순례자 한 명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광장을 지나 왼쪽으로 난 중세의 좁은 골목길로 사라진다. 영혼없는 동상처럼 한참을 앉아있던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한 발을 내디딘다. 미지의 현실로.

내일 일정은 카리온(Carrion)에서 칼사디야(Calzadilla)까지 17km. 

마을도 카페도 하나 없는 평원지대인 메세타(Meseta, 고원이라는 뜻) 구간이다. 음식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안내 책자에 따라 머릿 속이 분주하다. 사과 1알, 바나나 1개, 크롸상 2개, 계란 2알, 초콜릿, 비스킷, 컵 라면, 우유 그리고 물 2병. 음식을 배낭에 집어넣는다. 배낭 무게가 너끈히 9kg은 되는 것 같다. 혼자 걷기 시작하면서 음식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 오늘은 부쩍 S가 길을 걷다 채취한 씀바귀로 훌떡 만들어 주었던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가 생각하는 저녁이다.

짐 정리를 마친 후 침낭과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챙겨 베드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키에 맞춘 사다리, 오늘따라 침대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낑낑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엉덩이로 먼저 자리를 확보한다. 그러다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는 순간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외마디 비명, “엄마야!”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는다.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린 범상치 않은 눈빛, 예수님의 초상화다. 번뜩 한국에서 온 카타리나 언니가 뒤뜰에서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 전 묵었던 알베르게에서 50대 한국인 순례자 한 명이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떨어졌어요.” 

배탈이나 덤불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순례자. 길바닥에서 배낭하나가 주인을 기다리며 망을 보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말이 갑자기 뒤통수를 탁 때린다. 사다리에 고정되어 있던 나사가 풀리며 한국 여자가 사다리와 함께 뒤로 넘어져 알베르게가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이었다. 혹시? 머리를 흔든다. 설마 친구 S는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점점 머릿속을 점령해 들어온다. 그러나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에 침낭을 펴고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본다. 그러나 계속되는 불안감. 지퍼를 머리까지 끌어 올린다. 드디어 찾아온 암흑의 세상. 허리에 차고 있던 여권과 지갑을 빼서 침낭 아래쪽 발치로 밀어 보낸다. 이제 경계할 일도 없는 자유의 시간, 메이드 인 호주산 양 한 마리 침낭 속에서 댓 자로 누워 꿈속 세상으로 떨어진다.

집에 놓인 액자 속에서나 가끔 스치고 지나가던 내 젊은 날들이 기타 줄에 튕겨져 지금의 내 모습으로 오버랩 된다. 키 큰 순례자 한 명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광장을 지나 중세의 좁은 골목길로 사라진다.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디딘다. 미지의 현실로…
이른 새벽, 어제 침대 모서리에 걸어둔 고어텍스 점퍼를 찾아 입는다. 비가 오락가락할 거라는 일기예보에 따라 우비보다는 점퍼가 배낭을 내리고 또 잠깐 쉬기에도 편리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어제 아침거리로 준비해 두었던 컵 라면과 크롸상 그리고 우유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는다. 숙소를 나오니 어둠 속에서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레디고스(Ledigos)까지. 23km만 걷기로 한다. 도시를 벗어나는 길은 언제나 구도시에서 신도시로, 적색 신호등과 녹색 신호등을 번갈아 건너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잠든 도시를 빠져나간다. 

계속되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길은 어제보다 더 어둡고 바람은 차다. 지평선을 따라 순례자들이 개미 떼처럼 줄지어 가고 있다. 저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서 점으로 사라지는 순례자들, 그러나 그 끝 지점에 다다르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점들의 움직임. 혼자 걷고 있을 S가 생각난다. 그녀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며칠 전 브루고스에서 J가 갑자기 서울로 돌아가고 홀로 남게 된 S, 한 번도 혼자 여행한 적이 없다는 그녀와 헤어져 따로 걷고 있는 나. 어제 수녀님이 했던 말이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이 길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아주는 길이예요. 그냥 걷기 위한 목적이라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어요.” 

밀밭뿐인 17km의 길, 지루한 시선을 귀로 옮겨 소리를 들어 보기로 한다.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소리, 도랑에서 물 흐르는 소리, 길을 가로지르고 있는 민달팽이의 심장 뛰는 소리, 놀란 내 오른발이 땅에 미끄러지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내 배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아랫배가 요동을 치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뜨거운 라면에 이어서 마신 찬 우유가 원인인 것 같다. 두 눈이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전방위로 강렬한 레이더를 쏘아댄다. 그러나 아무리 걸음을 끌어당겨도 한결같은 들녘의 풍경. 

비를 맞고 걸어와서인지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고 있는 옆 테이블 쪽으로 자꾸 코가 벌름거린다.

뒤에서 순례자들이 연신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앞장서 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환청으로 들려오는 “부엔 까미노”,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온몸의 신경을 물샐 틈 없이 방어한다. 그러나 계속 흘러내리는 진땀. 뿌연 시야 너머로 물체 하나가 들어온다. 두 눈에 힘을 주고 물체의 정체를 끌어당겨 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간이 쉼터다. 그 뒤로 키가 허리쯤 자란 채 방치된 덤불도 보인다. 오리 궁둥이로 걷던 발걸음이 빛의 속도로 빨라진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덤불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순례자. 길바닥에서 배낭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며 망을 보고 있다.

급하게 꺾어진 언덕 아래, 칼사디아(Calzadilla)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첫 번째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시멘트 바닥에 지팡이와 배낭을 내던지고 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다. 신발을 벗으니 양말이 젖어있다. 옆 테이블에서는 동키 서비스(Donkey service, 배낭 트랜스퍼 서비스)로 배낭을 맡기고 가볍게 걸어온 순례자들이 소시지와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웃음을 주고받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비를 맞고 걸어와서인지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고 있는 옆 테이블 쪽으로 자꾸 코가 벌름거린다.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점심이 담긴 배낭을 버려둔 채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카페 안에는 익숙한 얼굴 몇 명과 함께 카타리나 언니가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 스페인식으로 우유를 넣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주문을 위해 계산대로 향하던 발걸음이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한다. “저 혹시 언니 그 사다리에서 떨어졌다는 한국사람 말이에요?”. “아.. 참! 그 순례자도 시드니에서 왔다고 했던 거 같아.”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맨탈 붕괴 직전의 순례자. 배낭을 짊어진다. 그리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처럼 힘겹게 한 발을 내딛으며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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