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돌격대 by 윤건,왕광국,남성일,김현욱,백일광,림주석, 212 x 524cm, 사진출처 : 광주 비엔날레 2018

사진으로 많이 봐서인지 평양은 금방 익숙해졌다. 그보다는 차라리 개성이 훨씬 이국적(?)이었다. 박연폭포에 올라가 보니 정선의 화폭에서 뿜어나오던 기개가 이해 될만큼 물줄기에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황진이와 서경덕의 러브스토리는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달달하게 회자되고 있는듯 했다. 쿠데타로 새 왕조가 들어서기 전 고려의 흔적이 천년의 시간을 넘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 정몽주의 혈흔인지는 알수 없지만 선죽교에 불그스름한 얼룩도 보았다.

이번 여행의 감회중 하나는 ‘향수’라 할 수 있겠다. 공간을 옮겨간게 아니라 시간을 과거로 이동한 느낌이랄까...북한의 음식에서는 아주 오래전 우리 모두 순수했던 시절의 정서가 느껴졌다. 홍수환 선수가 챔피언 먹던날 다같이 흑백 텔레비전 앞에서 나눠 먹었음직한 음식말이다. 지나치게 달고 짜거나 맵지 않으며, 꾸미지 않은 음식은 30대의 울엄마가 10살남짓 내게 해주시던 그 음식이었다. 북한의 이마트격인 ‘광복지구 상업중심’에 갔을때 백동무가 ‘내래 여성동무들만 특별히 사주는기야요’ 하며 건넨 김 모락모락 나는 만두는 엄마 따라 시장갈때 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누군가 아침마다 나와 쓸어 놓은 듯 깨끗한 평양 시가지는 새마을 운동 후 말끔해진 동네 큰길 모습이었다. 그리로 아침마다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확성기를 통해 틀어주는 주체 사상 가득한 곡들은 언뜻 들으면 새마을 노래 같았다. 데자뷰라 할까... 낯설지 않았다. 붓으로 직접 쓴 간판들 사이를 지나가는 바리깡 날세워 자른 짧은 머리의 남자들.. 그들은 대체로 무표정이었으나 말을 걸어보면 경계하다가도 끝내 미소를 보이곤 했다.

로동자 by 최창호(인민예술가), 98 x 70cm, 사진출처 : 광주비엔날레 2018

북한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조선화’가 있다. 우리로 치면 한국화이다. 한때 동양화라 불리운적도 있으나 중국의 회화나 일본화와 구분하며 한국 특유의 화풍으로 정착시킨 것이 한국화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조선화는 역시 동양화에서 시작되었으나 북한 특유의 상황과 의식이 반영되고,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매우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달되었다. 주제화(북한 체제의 이념을 표현한 그림), 집체화(여러 작가가 공동으로 제작한 그림), 몰골화(밑그림 없이 일필휘지로 한번에 그린 그림), 군중화(여러 인물들의 노동이나 행위를 표현한 그림), 보석화(보석같은 천연돌가루를 물감대신 사용한 그림) 등이 조선화의 다양한 표현방법에 따른 명칭들이다.

북한에서는 예술가에게 등급에 따른 칭호를 부여한다. 북한 최고의 상인 김일성 상을 받은 예술가인 ‘김일성상 계관인’이 있고, 최고 등급의 화가에게 수여하는 타이틀인 ‘인민 예술가’ 그다음으로 ‘공훈 예술가’ 가 있다.
북한에는 소위 말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개방 40년만에 신진 작가들이 쓰나미처럼 터져 나와 세계 컨텐포러리 미술의 확고한 위치를 꿰찬 중국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해방이후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도입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외부 사조의 마지막 수용이었다. 이후 폐쇄되고 고립된 상황에서 북한의 작가들은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선봉에서왔다. 시대의 요구나 필요로 탄생한 문화는 호불호를 떠나 그 자체로 인정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북한 미술에 관심을 가져볼때이다.

그 어느때보다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정치보다 민간 차원에서의 예술적 관심과 교류로 경계를 허무는 시도는 분명 의미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내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의 문화 유산들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보존 되고있는 것에 대한 개선 방안도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소나기 by 김인석, 217 x 433cm, 사진출처 : 광주비엔날레 2018

떠나는날 아침 모두 가방을 챙겨 밴에 올랐다. 공항으로 떠나려는데 이동무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에 늦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허겁지겁 밴에 올랐다. ‘내래 섭섭한데..뭐 드릴건 없고, 그동안 찍은 동무들 사진을 뽑아왔습네다’ 하며 사진관에서 프린트해온 사진을 건넸다. 수없이 찍고 찍히는 많은 사진들, 모발폰 안에만 잔뜩 저장만 되어 있던 이미지들이 봉인이 풀린듯 손안으로 전해졌다. 지난 며칠간 우리와 함께한 두 안내원 동무들, 그리고 묵묵히 여기저기 운전으로 실어나른 조동무와의 시간이 거기 있었다. 뒷면에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듯한 서명이 있고 일부는 코팅까지 되어있었다. 또한, 내게 좋은 자료가 될것이라며 인민 예술가 정창모 작가의 작품집을 주었다. 이런저런 신변 잡화들을 선물이랍시고 내놨던 우리가 민망해진 순간이었다.

여권을 돌려받았다. 열어보니 여권 어디에도 북조선인민공화국 이라거나 DPRK 등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양에서 출국스탬프가 찍힌후 다시 들어가기까지 7박8일간이 빈다. 이럴때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는거겠구나 싶었다. 심양 공항에 도착하자 알 수 없는 허탈함과 함께 누군가에게인지 모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모발폰을 켰다.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 일단은 인터넷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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