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나라에 살면서 모국을 회상하거나 그리워하면서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런데 그 일은 대개 안타깝게도 구체적 정황이 생략되고 감정 노출이 앞서는 결과로 이어진다. 감정이 앞선 채로는 남의 공감을 불러올 수 없다. 글쓰기는 ‘나’를 놓치지 않되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으로 강화된다. 이때 이민자의 체험에서 가장 유효한 것 하나는 ‘나’에게 내재된 과거(주로 고국 체험)와 내가 만난 현지의 낯선 삶을 객관적으로 대비하는 일!

홍진순의 「나치소녀」는 요양원에서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어머니가 관찰된다. 시어머니는 치매기가 뚜렷한 중에도 게르만 인들이 히틀러에 매료되었던 어린 시절 ‘도이치소녀’로 사랑받던 기억을 붙들고 있다. 그 시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며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을 짚어내고 그것을 ‘나’의 조국에서 6.25전쟁에 따른 아픈 상처와 대비한다. 이로써 서로 다른 나라의 체험 안에 인류 본원의 동질성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이 일깨워진다. 

작가 홍진순은 1952년 경북 의성 출생으로 대구의 국군간호사관학교를 나와 군병원 근무를 마치고 1981년 독일로 취업이민을 간 파독 간호사다. 독일 이민법 개정으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로 옮겨 빈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5년 뒤 오스트리아 인과 결혼했다. 남편의 안과 병원 매니저로 일했고 2012년 은퇴 후 2남 1녀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지냈다. 4년 전 ‘오스트리아 한인 문우회’에 나가 처음 글쓰기를 접하고 문학 습작을 하게 되었다. 수없이 쓰고 고치고 다듬은 수필 「나치소녀」 외 2편으로 2019년 <한겨레 문학>창간호(여름호) 신인상에 당선해 등단했다. 
‘나치소녀’는 히틀러에 매료돼 그 광기에서 이념과 정치의 허상을 보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그 시절 게르만 청년들의 이상형이던 자신의 아름다운 시간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한 여성의 애절한 마음을 기리려는 취지에서 택한 일종의 조어(措語)라 할 수 있다. - 박덕규(단국대 교수)

빈 근교 조그만 숲속 마을의 자택 정원에서 홍진순

나치 소녀(Nazi-Maedchen) / 홍진순

23호실 방문 앞에 이르자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진이냐?”
이젠 내 발소리만 듣고도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시는 모양이다. 
“예, 어머님. 저예요.” 
방문을 급히 열고 들어서는데 정작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계세요, 어머니?” 
“여~기…….”
시어머니는 욕실에서 두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문을 찾고 계셨다. 순간 울컥해진 나는 욕실로 들어가 당신의 두 손을 잡고 나와 의자에 앉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욕실에서 문을 찾느라 헤매셨을까!.
“아이들은 벌써 학교에 갔니? 웃고 재잘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던데…….” 
시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우리 집에 머물며 아이들과 같이 사는 것으로 생각하실 때가 많다. 어쩌면 그 편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시력을 되살려보려고 투약한 코르티존이 지나쳐 시어머니의 얼굴은 보름달이 되었고 팔과 다리는 어디에 조금만 닿아도 실핏줄이 터져 늘 시퍼런 멍이 들곤 했다. 밤낮의 구별이 없이 온통 어두워진 어머니의 세계에서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당신은 새벽에 일어나 느닷없이 밥을 찾기도 했고 저녁에 뜬금없이 누군가를 초대하는 전화를 걸곤 했다. 우리 부부의 생활리듬이 깨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들이 불안해하는 걸 알고부터 시어머니의 그 돌발 행동이 견디기 버거웠다. 마침내 남편이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우리는 시어머니를 가까운 요양원으로 모셨다

1937년 알피니스트였던 ‘나치소녀’ 시절의 시어머니

처음에는 매일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당신의 그 외롭고 험난한 길에 동반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건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내 등에 업힌 아이는 거기만 가면 불안한 얼굴로 칭얼대었다. 종일 침상이나 휠체어에 앉아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노인들, 헝클어진 백발과 빛 잃은 눈에 아이는 겁을 먹고 빨리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그 옛날 독일 뭇 남성들의 이상형이던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의 소녀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금발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서 지나가면 나치 군인들이 “하이, 도이치소녀!” 하며 팔을 들어 올리고 나치식 경례를 올렸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가문의 딸로 성장한 시어머니와 검은 머리의 한국인으로 자라난 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쟁과 가난을 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당신은 독일이 일으킨 전쟁을 몸소 겪었고, 나는 전쟁이 남긴 상흔 위에서 살았다. 우리 사이에는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기다란 다리처럼 놓여 있었으나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 거리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금의 내 나이와 한국의 삼십 대가 오히려 더 멀고 아득할지 모른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보스니아를 간 적이 있다. 10년 전 전쟁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넘어온 그 나라의 난민 가족이 우리 집에서 2년간 머문 적이 있었다. 해서 그 나라는  어딘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고, 지금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폐가마다 숭숭 남아 있는 총알 자국이 섬뜩했다. 전쟁 후유증을 씻어내지 못한 분위기가 아리게 다가왔다. 특히 어머니가 우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경치를 접하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가도 구석구석 암울하고, 뻥 뚫린 동굴처럼 서 있는 집들을 보면 이내 한숨을 내쉬곤 했다.
10년 전 보스니아 가족이 우리 집에 살 때 어머니는 그들에게 주려고 매주 생필품을 한 보따리씩 사들고 들어왔고, 인심이 후한 할머니가 되어 그 아이들을 챙겼다. 그러면서 당신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되새겼다. 

1952년 의사 시절의 시어머니

나도 내 부모 형제들이 겪은 6.25전쟁 때의 일을 떠올렸다. 부모님과 친지들이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 대열에 끼어 걸어가는데 어린 아기 두 명이 설사를 하면서 그렇게 울더란다. 그 울음소리에 위협을 느낀 어른들은 입을 모아 결국 여자아이는 버리고 남자아이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한참을 걷다가 그 아이의 엄마가 뒤돌아보니 18개월 된 여자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장아장 뒤따라오고 있더란다. 엄마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아이를 들쳐 업고 달렸다. 그 아이가 독일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지금 칠순을 눈앞에 둔 내 언니다. 
내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가 또 있다. 피란민들이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 길에 쓰러져 있는 소를 잘라오기로 했는데 칼이 들지 않아 몸통은 어쩌지 못하고 젖통만 잘라와서 자식들을 먹였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 얘기였는데 놀랍게도 시어머니도 시할머니도 그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남은 패물을 들고 몇십 리 시골길을 걸어가 먹을거리를 바꿔온 일, 땔감이 없어서 집의 가구를 부수어 아궁이에 넣은 일, 의대 졸업식 가운을 잘라 커튼을 만들어야 했던 일……. 시어머니의 사연이 우리 친정 어머니가 겪은 일이었고, 우리 집 이야기가 시어머니 집 이야기였다. 어머니들은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걸으며 자식들을 길러냈다.

시어머니는 독일군이 일으킨 전쟁 때 안과의사로 근무를 했다. 경보가 울 때마다 지하로 피신했다. 소련군 병사가 부상병을 데리고 와서 총부리를 겨누면서 치료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부상병들이 약을 먹기 전에 의사가 그들의 눈앞에서 먼저 먹어 보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전쟁은 히틀러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는 당시 독일 국민이 그런 히틀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피해자이자 히틀러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들을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막상 히틀러에 대해 저주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상황 몇 가지를 들려주셨다.
자신의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독일로 떠난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1938년 가장 먼저 고국을 정복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고 한다. 극심한 실업상태와 가난을 해결하고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게르만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구호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감격한 것이다.
히틀러가 빈 시내 영웅의 광장에서 연설할 때 수백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만 응시하고 연설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착각인지, 아니면 마력에 홀린 것인지…….’

1992년 시어머니와 함께 가족 나들이 중

물론 이 열대여섯 살의 소녀에게도 그렇게 느껴져 왔다. 히틀러의 약속대로 실업자 수가 줄어들었고 경제 사정도 나아졌으니 그 환호가 후회로 이어질 리는 없을 듯했다. 유대인 이웃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그들의 집과 물건을 경매에 내놓아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발표된 연합군들의 보고에서였다. 철통같은 보안과 공정한 정보의 억압 아래서 대부분 일반 국민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고, 자주 시어머니는 회한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은 안과의사로서 자신에게 닥친 무서운 안과 질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편안한 모습에서, 당신이 그 질병으로부터 영혼을 분리시켜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의사들은 말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정신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자기방어가 작동된 것이라고. 
어느 날 절친한 신부님이 영성체를 모시고 병 문안을 오셨다.
“지금의 나를 보지 말고 40년 전의 나만 기억해 주세요.” 
시어머니는 모처럼 또렷한 의식으로 경쾌하게 말하고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셨다. 시어머니는 가끔 그 시절의 나치 소녀로 돌아가 생기를 조금씩 얻어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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