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1년 예정으로 단국대학교 박덕규 교수와 중앙대학교 이승하 교수가 교대로 재외한인문학의 면면을 살펴보는 글을 연재할 것입니다. 연재를 시작하는 이승하 교수는 시를 중심으로, 박덕규 교수는 소설과 수필을 중심으로 쓸 예정입니다. 2017~2019년 한호일보 주최 문예창작교실에서 특강을 했던 두 분 교수의 연재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편집자주).

한국에 IMF 외환위기라는 태풍이 휘몰아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호주에 계신 분들 중 그때 떠나온 분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안다. 먹고살 길을 찾아 트렁크에 옷가지나 좀 넣고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재미교포 윤영범 씨도 그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선가게를 시작으로 일식집, 이태리 식당, 식료품 가게를 해보았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미국에서 산 지 20년이 되는 지금은 약품 도매업을 하고 있다. 생활은 조금 안정되었지만 영혼의 갈증이 너무 심해 시를 쓰기 시작하여 2001년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2006년, 계간 『문학나무』 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다. 등단 10년 만에 문학나무사에서 첫 시집 『그리움도 숨을 쉬어야 산다』를 펴냈다. 

미국에서는 야심한 시간에 취해서 거리를 배회하면 강도에게 돈을 털리기 쉽다지만 한국에서는 포장마차에서 밤새 술 마시는 일이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취하면 택시를 타면 된다. 뉴욕의 플러싱(Flushing, 시인이 사는 뉴욕의 동네 이름) 골목의 코너에 새로 생긴 술집 ‘뉴욕 포장마차’에 가서 오랜만에 취해본다. 뉴욕에 한국 사람이 많이 사니까 이런 포장마차도 생겨난 것일까, 신기하다. 

포장마차 안은 오직 떠나온 자들의 고된 꿈을
용서하는 곳이니
주머니 속 너절한 아메리카 드림 
휴지통에 구겨 넣고,
오늘은 
비틀거리는 꼼장어에,
초겨울 뉴욕의 오뎅 국물에,
가슴속 숨어 있는 아련한 첫사랑에
붉게 취하라 모두들.

「뉴욕 포장마차」 후반부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이민자들이어서 그런지 “Made in Korea 붙은/ 참소주 병을 목탁처럼 두들겨 가며” 마시고는 대취한다. 그들이 꾸었던 꿈이 왜 “고된 꿈”이며 아메리카 드림이 왜 “너절한 아메리카 드림”일까. 돈도 웬만큼 벌어 생활은 안정되었을지라도 (대개는 그렇지도 않다) 미국에서의 삶은 팍팍하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버스 한두 번 타면, 지하철 몇 정거정만 가면 친구나 친지를 만날 수 있는데 미국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한나절은 가야만 지인을 만날 수 있다. 밤 문화가 없으니 친구들과 술추렴하기도 쉽지 않다. 돈을 안 벌면 괴로운 나날이고 돈을 벌어도 외로운 나날이다. 몸은 뉴욕에 있지만 기억과 정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떠나오지 못했다.  

열 살 아들이 전화를 했다.
“아빠, 나 hair cut했어.” 
“응, 잘했어. 이따가 보자.”

늦은 밤 집에 들어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다 가슴이 아련해 오면
내 가슴을 대신 쓰다듬는다.

쏟아 들어오는 별빛으로
눈이 따끔거리고,
가슴도 따끔거리고

머릿결처럼 고운
아이의 꿈 옆으로
고단한 잠자리를 편다.

「뉴욕 일기」 전문  

이 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부자가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니 아들은 잠들어 있고, 가장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더니 아이 옆에서 잠이 든다. 아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화자보다 더 늦게 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낮에 아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는데 아들이 아빠에게 한 말이란 것이 “아빠, 나 hair cut 했어”가 전부다. 부자가 같이 자고 있지만 참 쓸쓸한 풍경이다. 이 시에 공감할 호주의 교민 분들이 꽤 되지 않을까. 부모-자식 간에, 할머니-손자 간에 대화가 별로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조부모 세대도 부모 세대도 이민 간 그곳에서 삶이 참 쓸쓸한 것이다. 영어를 하는 손자와 손녀 앞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운함과 함께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손자ㆍ손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 영어학원에 등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시가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손자ㆍ손녀는 나중에라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외로움을 이해할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를 썼다. 외로운 아웃사이더, 혹은 이방인은 할 말이 많은 법이지만 들어줄 대상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를 쓸 수밖에.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지 않더라도 쓰다 보면 외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아니, 옅어질 것이다. 외로우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아래는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일부다. 이민 간 초기, 그는 허구한 날 생선의 배를 칼로 갈랐다. 

갑자기 빛나는 추억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살며 주워온 부끄러운 껍질들도 떨어지고
말갛게 드러나는 알몸
배를 가르면 쏟아져 나올까
숨겨두었던 사랑이며 그리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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