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해외 한인들은 고국에 대하여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가? 긴 설명을 한다면 잔소리가 된다. 1세들에게는 정신적 고향이며, 미군 주둔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 말마따나 아주 잘 사는 나라다. 그러나 걱정해야 할 문제도 많다. 
 
하지만 고국을 향하여 현재 우리가 내는 목소리는 장단 맞추기 보다 더 나을 게 있는 지 모르겠다. 인구 5천만의 한국은 큰 직함에다가 높은 연봉을 받는 전문가, 학자, 지식인이 과잉이라 할 만큼 많다. 몰라서 못하는 일은 없어 보인다. 요즘 한국에서 큰 국가적 이슈가 된 친북과 반일만 해도 그렇다. 이미 찬반 주장과 이론이 대중매체와 전문가의 입을 통하여 충분히 피력되어온 셈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면 국제나 고국 보다는 왜소하게 보여도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커뮤니티의 사안을 먼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뭐 글의 머리가 이런가? 소신과는 달리 글을 쓰는 변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하다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조국 교수가 발단이 된 폴리페서 시비 관련이다. 국회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새로 불거진 조씨 일가의 비리 의혹으로 묻혀버린 듯 하나 국가 장래를 위하여 이만큼 중요한 게 없어 보인다. 물론 어제 오늘의 이슈는 아니다. 
 
그런데도 쓰는 이유는 과거와 오늘의 쟁점 모두가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고 봐서다. 이번에는 정치교수들의 휴직이 초래하는 강의 공백과 그 피해를 거론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목소리가 그 시발이었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더 뿌리 깊은 문제는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권력에 맛을 들여 본분을 버리고 학교와 정관계를 오락가락 하는 기회주의, 그게 가져오는 학문 수준의 퇴보와 한 나라의 대표적 지성공동체인 대학의 권위와 역할 상실이다. 눈에 얼른 안 보일 뿐 그게 정치와 사회를 멍들게 하는 부작용은 심각하다. 가히 나라의 망조다. 
  
학자의 길은 가시밭
학문 수준을 가늠하는 한가지 잣대는 노벨 수상이다. 많은 선진국 학자들이 이 상을 받았다. 학문과 무관한 노벨 평화상을 빼고는 한국은 아직 단 한 명도 못 받았다. 국력을 탓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실적과 명성이 정치와 돈의 힘으로 결정되는 풍토에 익숙한 한국인다운 착상이다.
 
학자의 본분은 뭐니뭐니해도 학문 연구다. 사람이 일생을 배워도 머리에 입력되는 지식의 분량은 쥐꼬리만하다. 더욱 남다르게 창의력 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일은 대개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면 학자는 오로지 학문에 대한 일념으로 연구에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의 길은 가시밭이다.
 
한국의 대학 풍토는 그게 아니다. 교수직이 배가 고프거나 사회적 대우가 낮아서가 아니다. 과다한 업무량도 아니다. 그 반대다. 교수의 급여로 말하면 한국의 수준이 선진국에 비하여 낮지 아니하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단 그 자리를 차지하면 처세하기에 따라서는 줄줄이 사탕으로 굴러오는 이권의 유혹이 커 따분한 연구실에 처박혀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노벨상급 학자가 안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학문과 학자의 기본인 엄격성(rigorousness)은 물으나마나다. 부정 입학, 느슨한 학점, 제자에 대한 갑질, 대필 논문 박사, 가짜 학위, 입학마저 안 한 외국 대학 이름을 이력서에 기재하는 교수들이 많다. 이런 나라의 학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자료에 따르면 인접국 일본은 작년 현재 2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 유학파들의 말을 들어 보라. 학자들이 어떤 삶을 사는가. 여기 좁은 지면에 따로 쓰지 않는다.
 
현재 학문 업적으로 받는 노벨상 분야는 의학, 물리, 화학, 문학 등 몇 개뿐이다. 만약 그걸 인문사회과학 분야로 늘린다면 한국은 노벨상은커녕 명함마저 내놓을 수 없는 창피한 나라가 될 것이다. 학자들이 리서치를 게을리하고, 그렇게 해도 되는 교육계와 지식인 사회가 그렇게 만든다. 
 
실추된 대학의 권위
실력 있는 대학 교수가 정관계에 들어가는 게 왜 나쁜가에 대한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학의 권위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학은 그 위치로 봐 사회 정의의 마지막 보루와 방패가 되어야 한다. 그런 특권은 부당한 외부 세력에 굴하지 않는 교수들의 독립된 학문 연구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학자적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권위와 전통이 우리 대학에 있는가.
 
사회정의를 지킬 일차 제도적 책임은 사법부가 맡는데 한국에서 그게 정권과 돈의 시녀가 된지 오래다. 언론과 함께 교수들의 대거 정관계 진출과 어용이 대학도 정권과 한통속이 되게 만드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정치 교수가 되기 위하여는 평소 TV 시사토론이나 신문 칼럼에 자주 나와 정권에 추파를 던져야 하는 사실 하나만 봐도 그러하다. 이제는 다르다고 누가 감히 말할 것인가.
 
통계를 될 수 없으나 한국의 폴리페서 숫자는 선진국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많다. 대한민국의 대세가 된 느낌이다. 정권교체 때마다 불러주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는 그들을 보라. 동료와 사람들이 그걸 관운이라며 부러워하고, 발탁되는 당사자들도 명예로 삼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학자들의 외도에 대한 한가지 좋은 구실은 현실 참여다. 해방 공간에서 전문인 부재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해야 했었다. 지금은 우수한 행정 관료가 과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수들이 굳이 총리, 장관,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을 안 해도 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총리가 된 모 전직 교수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라는 구호를 내세웠으나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대부분 교수 출신 고위직자들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때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 사람 뭐 이렇게 까다로우냐고 꾸짖을 수 있다. 또 학교와 연구실 밖에 모르는 착실한 학자들이 많음을 안다. 그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한국이 겪고 있는 오늘의 혼란상은 냄비식 이슈 논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다를 분야 전문가가 할 수 없는 심층적 연구 결과로 길을 밝혀야 나라가 살 텐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대학은 취직만을 준비시키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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