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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단상] 크리스찬 인생관버림과 따름 2 -마태10,37-39-
곽승룡 비오 주임 신부(시드니대교구한인성당) | 승인 2019.08.22 15:13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0,37-39)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 38)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은“나를 따르고자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매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자신을 버리는 것이란? 인생의 길에서 자신만 존재하지 않기를 초대하시는 듯싶다. 주님은 자신을 팽개치라는 것보다는 타자 특히 가난한 이웃을 초대하기를 바라신다. 둘째, 내가 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선택은 우리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는 말씀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사랑과 헌신의 절정은 십자가다. 하지만 사실 십자가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최고의 폭력이었다. 그런 폭력은 인간을 거룩하게 할 수 없었다. 자유가 존재해야 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자유가 성덕을 존재케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인 듯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롭게 십자가를 지시고 폭력을 헌신과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께서는“십자가 위에 못을 밖으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오히려 빌라도가 한 말이다. 예수님은 “제 십자가를 져라”하고 말했다. 예수님 스스로 자유롭게 십자가를 지셨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지신 이 십자가의 자유가 빌라도가 벌인 불의한 재판과 폭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유로운 믿음 안에서 폭력과 명령을 사랑으로 바꾸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모든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손에 있고, 우리는 오직 그분을 자유롭게 기꺼이 따르면 된다.

이제 십자가를 지기위해 내가 깊이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다. 나의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정에서 부모들이 선택해야 하는 십자가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범례는 자신의 경력(career)쌓기를 뒤로 하는‘내려놓기’와 가족과 함께‘가정에 머물기’사이에서 십자가를 지기를 결정해야 하도록 주님은 초대하신다. 나는 과연 주님의 십자가 또는 가정을 위한 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부모일까? 주님을 따르도록 어떤 것을‘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한 자기이해 그리고 다른 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선행된다면, 그것을 위해 십자가 지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이를 내려놓도록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닐까?
물론 가정 안에서의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는 없다. 곧 부모는 생각이 많은데 식구들은 몸이 잠들어가고 늘 머리보다 더딘 듯싶다. 서로의 속상함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식구들이 밉기도 하고, 서로 자신의 속상함에만 이유를 설명해가며 말하는 자신들이 안쓰러워 지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지금처럼 항상 친구처럼 서로의 곁을 지켜가면서 함께 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믿고 의지한다. 이것이 가족인 듯싶고 이것이 서로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닐까?

주님은“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분열을 말씀하신다. 특히“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12,52-53) 가족에서의 갈라짐, 분열, 미워함이다. 그런데 이는 멸망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로 가는 길의 모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2-1226)도 아버지와의 헤어짐, 부자의 옷을 벗어 아버지께 주고 가난의 옷을 입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이처럼 가족 안에서 부유함과 분열되면서 가난한 삶으로 세상에 평화를 전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예수님 성탄축제 때 길거리의 노숙자들을 바티칸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오늘의 온 교회가 참으로 버리고 따라야 할 모습이다.

곽승룡 비오 주임 신부(시드니대교구한인성당)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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