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뒤 안개 속으로 걸어가는 미리엄과 윌리엄 / 인구 77명이 사는 라바날의 비온 뒤의 거리 풍경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 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며칠 전부터 발톱의 색깔이 검게 바뀌었다. 눌러보니 피고름이 나온다. 염증이 생겼 나보다.  순례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발가락에 작은 물집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집은 사그라졌는데 대신 발톱의 색깔이 변했다. 오늘 아침에는  발톱이 흔들리기 까지 한다.   발톱이 잡고 가던 손을 놓았나? 들썩거리고 구부러져 있다. 발톱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양말을 신어야 하나. 발톱도 없이 생살로 이 먼 길을 끝낼 수 있을까. 양말에 부대끼고 신발에 부딪히고 내리막길에서 짓눌린 발가락을 바라보며 바셀린만 듬뿍 바른다. 

덩쿨 장미가 그림같이 걸려있는 라바날의 초록색 대문집

아침부터 내리는 비. 머리 꼭대기에서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비옷을 입고 다시 까미노에 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25km 지점의 라바날(Rabanal)이다. 우리보다 며칠을 앞서 걷고있는 친구가 이곳을 떠나며 눈처럼 하얀 꽃길을 사진에 담아 보내왔다. 그녀는 피레네 산맥을 아버지라고 한다면 라바날로 가는 길은 어머니 같은 산길이라고 한다. 지팡이를 찍으며 어머니 산으로 오르는 길. 하얀 싸리꽃들이 손을 벌리고 있다.

산으로 들어서자 몇 발치 앞에서 미리엄(Miriam)이 보인다. 이 곳이 세 번째라고 한 그녀는 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가르쳤다고 한다. 짧은 생머리를 추어올려 묶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레온의 카페였다. 혼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창문 밖을 바라보던 여인. 자연주의자인 남편 윌리엄은 미리엄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머리 염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그레이 헤어는 그녀의 자신감이다.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그녀만의 노래처럼 들린다. 

비가 굵어지고 있다. 속도를 낮춘다. 점점 멀어지는 윌리엄과 미리엄의 뒷모습. 경사가 급한  산길을 오르며 거친 숨을 토해낼 때 쯤 남편과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소리 없이 모자 위로 내려앉는 빗 방울. 모자는 젖어서 무거워지고 빗물은 목덜미를 타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적신다. 바짓가랑이는 젖어서 휘감기고 신발 속에는 빗물이 철벅거린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걷던 젊은 날.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적실 때나 빗줄기가 등 짝을 후려칠 때마저 빠져들었던 청춘의 안락감. 결핍이었나? 산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는 힘든 길이지만 온종일 내리는 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준다. 비와 안개, 젖은 나무, 멀리 앞서서 걸어가는 두명의 순례자가 풍경화 같은 하루. 

 산동네 라바날에 가까워지며 빗물이 신발 위로 발목 위로 덮쳐온다. 산 꼭대기에 오르자 멀리 마을이 보인다. 다리 하나를 돌아가니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두 손을 흔드는 윌리엄과 미리엄. 초록색 깃발 같다. 갑자기 온몸이 따뜻해진다. 미리엄은 우리를 알베르게로 안내한다. 종교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펼쳐진 숙소로 들어가며 윌리엄은 손을 벌려 자원봉사자 한 명을 껴안는다. 그에게도 힘든 하루였나보다.

우리 차례가 되자 자원봉사자 한 분이 일어나서 두 손으로 악수를 청한다. “비가 많이 와서 힘들었죠?”. 따듯한 물 한잔을 따라 준다. 여권을 보더니 “아주 먼 곳에서 오셨군요. 부엔 까미노”하며 도장을 찍어준다. 침대를 정해주고 커피와 빵, 비스킷이 있으니 우선 요기라도 하라며 싱긋 웃으며 나간다. 젖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마을로 나온다. 윌리엄은 숙소에서 쉬고 싶다고 한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을 닮은, 야트막한 하얀 담장에 보라색  꽃들을 안고있는 라바날.  멀리 마을 끝에 반쯤은 안개에 감추어진 비에 젖은 카페가 보인다. 끄트머리 의자에 앉는다. 물끄러미 둥지 위에 앉아있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새이다. 

사하군( Shagun)에서 보았던 그 새다.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잿빛의 전신주. 내 키보다 더 큰 둥지를 전봇대 꼭대기에 지은 새들. 저 집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새집에 홀려 따라가다 보니 언덕 너머로 야트막한 집들이 다닥다닥 보였다. 버려진 집들이다. 사람의 숨소리도 사라져 버린 곳. 순례자가 이 길 위를 가득 메웠던 시절의 흔적들. 순례자 숙소나 병원에서 허드렛일했던 사람들이 사는 구역이었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이 골목마다 이렇게 많다니. 숭숭 구멍이 난 진흙 벽에 걸린 5월의 햇살. 집안을 들여다보니 검은 새들이 모여 살고 있다. 사람이 떠나면 자연이 대신 채우는지. 지붕 위 커다란 둥지에서도 이름 모를 새들이 우리를 낯선 침입자 인양 노려보고 있었다. 발목을 감는 섬찟함. 순간 중세를 살던 혼령들이 새가 되어 우리를 잡고 늘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순례자에게 일용품을 파는 상점의 아름다운 간판/ 창문에 걸린 붉은 꽃

라바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가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숙소에 도착하면 샤워를 하고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곤 하는 남편이다. 옆 침대에서 책을 보던 순례자가 남편이 이층에 있다고 말해 준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른 이층 라운지에서 윌리엄과 미리엄은 순례자들과 함께 벽난로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내가 온지도 모르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벽난로의 불길만 바라보고 있는 남편. 다시 뒷마당으로 나온다. 비가 온 뒤라 이파리들이 늘어져 있다.  숙소의 넓은 정원의 한쪽 편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다. 갈대밭 속에 손을 집어 넣는데 어린 이파리가 내 손을 만져 준다. 이 초록의 갈대가 가을 색으로 바뀌는 10월에 이곳에 다시 오면 젊은 시절  을숙도의 갈대밭을 만날 수 있을까.  갈대의 울음소리. 나는 속으로 우는 갈대였나. 밭에서 푸른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오더니 갈대 기둥에 앉는다. 물기가 가득 찬 눈동자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인구 77명이 산다는 이 마을. 다시 나온 거리에는 순례자들만 보인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늦은 점심을 먹는 유럽의 여인들. “부엔 까미노”하며 다음 마을로 가기 위해 배낭을 메는 젊은이들.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한 순례자들은 카페의 파라솔 아래서 느긋하게 오후 시간을 보낸다. 나는 오븐에 구운 가지, 버섯, 토마토에 감자 요리 또띠아(Tortilla) 한쪽을 시킨다. 맥주와 커피 그리고 아몬드 케이크까지.  

음식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같이 앉아도 될까요?”.  알베르게에서 만난 봉사자다.  빨강과 파란색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색이 바랜 청바지에 브라운 슈즈를 신은 그의 모습이 스마트해 보인다. 아마 내 나이의 은퇴자일까? 그는 자기의 이름을 쉐마(Chema)라고 소개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사진 한 장을 내민다. 부인이란다. 금발의 여인이 살짝 구부린 무릎으로 두 손주의 손을 잡고 웃고 있다. ‘쉘부르의 우산’의 까뜨리느 드뇌브를 닮았다. 쉐마는 63살의 건축가라고 한다. 자기가 사는 곳은 마드리드이고 건축 사무소도 그곳에 있다고 한다. 이 바쁜 사람이 어떻게 자원봉사자가 되었을까? 일년에 이 주 정도 시간을 내어 산티아고의 봉사자로 일을 한다는 쉐마. 매년 교단에 자원봉사자 신청서를 내면 봉사할 알베르게를 배정해 준다고 한다.  

나는 그의 자원봉사자로서의 하루가 궁금해진다. 아침 4시부터 떠나는 순례자를 위해 문을 열어 놓고 커피 포트의 커피를 내린다고 한다. 오전 8시가 되면 순례자들이 거의 다 떠나는 시간. 그때부터 침대 시트를 빨아 널고  부엌과 세탁장을 치우고 가든 청소를 하고 순례자를 맞을 준비를 한단다. 커피를 내리고 빵을 썰고 차가운 얼음물을 채워 놓으면 준비 완료!  순례자가 도착하면 정해진 체크인 시간 없이 바로 받아 준다고 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꽃을 아름답게 가꾸는 비결은 무엇일까?

자신의 점심시간이 끝났다며 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쉐마. 나도 음식 값을 지불하려고 일어서자 주인이 나오며 쉐마가 내가  먹은 음식까지 다 지불했다고 말해준다. 너무 많이 나왔을텐데…. 오늘은 푸짐하게 먹기로 작정을 하고 주문한 거였는데. 쉐마는 “당신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이고 그 순례자를 돕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며 악수를 청한다. “그럼 저녁은 제가 살 테니 같이 먹어요” 바삐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 소리치자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어주고 가던 길을 간다. 그가 적어준 연락처를 꼭 쥐고서 어느 날 자원 봉사자가 되어 그와 함께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다음 날 아침. 발가락에 바셀린을 바르는데 죽어가는 발톱 밑에서 새로운 발톱이 자라나고 있다. 새벽에 떠오른 초승달처럼 맑고 보드라운 발톱. 등이 구부러진 검은 발톱이 아기 발톱을 안고 있다. 걸리적거려서 빼 버리려고 잡아당겨도 엄마 발톱은 꼼짝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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