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 광복장학회(이사장 황명하)는 2016년 3•1절에 올바른 인성과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들을 지원٠양성할 목적으로 광복회 호주지회의 산하재단으로 설립됐다. 올해는 제4기 광복장학생으로 호주 거주 한인 대학생 3명(UNSW 1학년 문건우, 시드니대 1학년 설아빈, 모나시대 3학년 허정인)을 선발했다. 학생들은 7월 17일~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중국 상해, 항주, 남경, 장사, 광주, 중경 등 10개 도시의 독립운동사적지 현장답사 교육에 참가했다. 3학생의 답사 기행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註) 

21세기의 불타는 독립정신 (문건우)

상해 외탄공원에서 학생단장을 포함한 6조 조원들 (오른쪽이 문건우 학생)

“나는 한국인인가? 호주인인가?” 나처럼 호주로 어렸을 때 이민 온 한국 학생들은 모두 한번쯤은 자신에게 물어 보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호주로 이민 온 나는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 문화나 사회를 잘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그 어려운 일제강점기 시대에서 광복의 길로 들어섰을까? 대한민국의 광복은 한국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미국 덕이 아닐까? 어린 나는 답을 찾아 내 방에 있는 책꽂이를 한국 역사 책으로 가득 채웠고, 12학년때 이 관심을 이어 HSC 영어 시험을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치렀다.

올해, 나는 믿겨지지 않게도 재호 광복장학회에서 선발한 3명의 한국 학생 중 한 명으로 뽑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 15기 독립정신 답사단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나는 바로 답사에 참가하기로 하였고, 거기서 배운 몇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올 해 15기 답사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8일에 거쳐 도보, 열차와 차량으로만 4,000km가 넘는 답사를 떠났다. 상해를 시작으로 우리는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치장 등을 따라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따라갔고, 임시정부가 광복을 맞이한 충칭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1일차 (상해): 독립을 이끄신 김구 선생과 목숨을 바치신 윤봉길 의사

우리 민족이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 기관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이는 곧 1919년 4월 11일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렀다.

우리가 중국에서 처음 방문한 장소는 유료 박물관으로 재건된 상해 임시정부 청사였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1926년부터 1932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거기서 우리는 마른 체구에 긴 콧수염을 한, 익숙치 않은 남자의 플라스틱 동상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분이 바로 젊었을 때 비쩍 마른 모습의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김구 선생에게 인과 신 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딸 또한 3명이나 있으셨다. 그 중 첫째 딸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고, 나머지 둘 또한 김구 선생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세상을 떠났다. 아내였던 최준례 여사 또한 상해에서 병에 걸려 1924년에 돌아가셨다. 김구 선생은 이러한 가족의 죽음을 가슴 깊이 묻어두시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온 삶을 투신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부단장이셨던 조범래 교수님으로부터 이 설명을 들으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본격적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홍구공원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곳은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국왕, 히로히토의 생일연에 물병으로 위장된 폭탄을 던진 곳이다.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은 일본군의 장성과 고관들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혔고, 이로 인해 윤 의사는 체포되어 고문 당하다가 마침내 1932년에 총살되고 봉분도 없이 묻혔다. 갓 태어난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은 그의 나이는 겨우 24 살이었다.

이 날 나는 더더욱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다. 거사가 있는 날,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자신의 시계를 건네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한다.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 짜리이니 저와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시계를 한 시간 밖에 쓰지 못합니다.” 이 문장은 그 날 하루 종일 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과연 나는 24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을 두고 인생을 헌신할 만큼 내 나라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시대가 얼마나 참담했으면 이렇게라도 후세들의 미래를 개선하려고 했을까? 윤봉길 의사는 아들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도 이렇게 전하셨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이렇게 우리는 답사 첫날을 무거운 마음으로 마무리 하였다.

2일차 (자싱과 항저우):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첫 날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 분들을 기리는데 답사의 중심을 두었다면, 둘째 날은 그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준 이들을 기억하는데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본군은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을 포함한 임정 요인들의 수색을 크게 강화시켰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큰 계기 또한 되었다. 그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장제스가 감탄하기를,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또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위해 막대한 도움을 준 미국인 목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와 그의 아내, 제럴딘 피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피치 부부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전 후부터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고,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후 일본군으로부터 쫓기는 김구, 김철 선생 등 임정 요인들을 20여일 동안 자신의 집에 숨겼다. 마침내 일본군의 포위가 집 앞까지 다가오자 피치 목사는 김구 선생을 자신으로 분장시키고, 스스로는 차부가 되어 김구 선생이 자싱에 있는 피난처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족들이 죽고 없는 타국에서 쫓기는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들, 그리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조국으로 돌아가면 곧 체포 되고 사형 당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중국에 있는 26년 동안 한시도 쉴 수 없었다. 이렇게 쫓기는 삶 속에 피치 부부와 같은 도움의 손길에 나는 엄청난 감사와 경외심을 느꼈다.

버스에서 가이드와 교수님들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다보니 어느덧 100km 떨어진 자싱에 도착하였다. 이 곳 중국 전통 거리 한가운데에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가 있었다.

자싱의 김구 피난처 전경

피난처 안에 들어서서 벽, 문 손잡이, 테이블 등을 손으로 느끼면서 둘러 보자니 역사가 되살아나 저 앞에 김구 선생이 살아 돌아다니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가파른 계단을 통해 2층의 침실로 들어가서 본 것은 또 다시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김구 선생이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마련해 둔 비밀통로

방 한쪽 구석에 나 있는 구멍...처음에는 마룻바닥이 잘못 놓여서 나 있나 했다. 그러나 그 구멍은 일본군이 김구 선생의 행방을 찾아냈을 경우에 대비해 피신 할 목적으로 일부러 만들었음을 곳 알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작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구멍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와서 집 뒤에 정박해 놓은 배로 일본군들로부터 피하기 위함이었다. 자싱으로 피난해서도 결코 마음을 놓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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