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1년 예정으로 단국대학교 박덕규 교수와 중앙대학교 이승하 교수가 교대로 재외한인문학의 면면을 살펴보는 글을 연재할 것입니다. 연재를 시작하는 이승하 교수는 시를 중심으로, 박덕규 교수는 소설과 수필을 중심으로 쓸 예정입니다. 2017~2019년 한호일보 주최 문예창작교실에서 특강을 했던 두 분 교수의 연재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편집자주).

가끔 미국에 가서 듣는 영어 중에 귀에 충돌을 일으켜 ‘응?’ 하고 되묻게 되는 단어가 꽤 있다. donation이 그 중 하나. 이게 내 귀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 같다. 우선 뜻밖에 ‘자주 들린다’는 것이고, 그래서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일어나서다. 거칠게 결론을 내리면, 미국인들은 donation을 많이 하며 살고 있고, 그것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이면 대개 ‘어떻게 donation을 일상으로 실천하며 산다는 거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액수는 적지만 정기적이거나 부정기적이거나 꽤 기부를 하며 산다. 사실을 넘어 진실을 말하면 그 기부는 거의 비자발적이며, 나아가 기부가 아닌 연회비 같은 걸 내놓고 기부금 낸 것으로 세금 처리를 해달라고 해서 연말정산 때 ‘쥐꼬리만 하나마’ 감세 혜택도 받곤 한다(아, 이런 일로 나를 인사청문회에 올릴 일은 없겠지?). 

지희선 미주 한인 수필가.

어쨌거나, 이민자로서 낯선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남다른 풍속에 부딪치며 특별한 감흥을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게 좋은 글감이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글감을 살리는 데 ‘구체성’이 얼마만큼 중요한지는 역시 더 말할 나위 없다. 그 이상으로 그 풍속을 얼마나 ‘의미 있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글의 질감이 아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하자. 미주 한인 수필가 지희선은 「아름다운 선물」에서 자신이 일하는 토탈 뷰티 살롱에 손님으로 온 한 금발 아가씨의 ‘donation’ 일화를 ‘아름다운 가치’로 서술하고 있다.   

지희선은 1951년 마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가 36년을 살고 있다. 천주교 성당에서 편집 일 등을 하면서 야마노뷰티칼리지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얻어 베버리힐즈와 플라야 비스타의 토탈 살롱에서 30년간 뷰티 계통의 일을 해 오고 있다. LA의 한 한국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필 한 편에 매료돼 수필을 쓰기 시작해 1995년 󰡔문학세계󰡕로 등단했다. 이 수필은 미발표작이다. - 박덕규 단국대 교수

박덕규 교수의 책, <미국의 수필 폭풍>에는 지 작가의 ‘기억의 저편에서’와 ‘아몬드 꽃 피고 지고’가 소개됐다.

아름다운 선물 / 지희선

세상의 모든 선물은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뭘까. 아마도 애틋한 마음을 담은 사랑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탐스런 머릿결을 지닌 금발 아가씨 안젤리카가 오랜만에 가게에 들렀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천사 아가씨다. 언제나 생글생글 눈웃음 짓는 안젤리카를 볼 때마다 덩달아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데 그토록 머릿결이 곱고 숱이 많아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긴 생머리를 싹뚝 자른 모습이다. 얼마 전에 대학 졸업을 하더니, 뭔가 마음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짧게 자른 모습도 생경하거니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그 이유가 더 궁금했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그 긴 금발 머리, 아까워서 어찌 잘랐을까?”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아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도네이션했어요!”
“뭐? 도네이션?”
예상외의 대답에 난 깜짝 놀랐다.
그 정도 결이 곱고 풍성한 머리카락이라면 돈으로 쳐도 고가의 최상품이다. 
“네! 벌써 네 번째 도네이션하는 거예요.”
“오, 그래? 어디에 도네이션했는데?”
“Pantene이라는 비영리단체에요.”
몇몇 비영리단체 이름은 알지만 Pantene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거긴 뭐 하는 곳인데 머리카락 도네이션을 받아?”
“아, 네. 머리카락 도네이션 받아 가발 만들어서 필요한 암환자에게 나누어 주는 단체예요. 주로 어린이 암환자에게 준대요!”
“호오, 그래? 안젤리카가 착한 건 알지만 그 정도인지는 정말 몰랐네? 퍽 자랑스럽구나!”
나는 안젤리카를 힘차게 안아 주었다.
안젤리카가 머리카락 도네이션을 처음 한 것은 열 살 때부터라고 한다.
소프트볼 선수였던 안젤리카는 매번 풍성한 머리카락 덕분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엄마를 닮아 머리숱도 많고 빨리 자라 처치곤란이었다. 엄마는 간편한 머리카락 관리와 필요한 사람에게 도네이션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안젤리카를 설득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땀은 범벅이 되는데 머리카락까지 무거워 귀찮던 안젤리카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단서가 딱 하나 붙었다. 도네이션하려면 절대로 하이라이트나 염색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예민한 암환자에게는 모든 게 자연산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는 덧붙여 설명해 주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때만 해도 멋모르던 안젤리카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머리카락은 3년마다 잘라 도네이션했다. 열 살, 그리고 중학교 졸업 후와 고등학교 졸업 후.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잘랐으니, 4년 만에 잘랐다 한다. 
길이는 약 17인치 정도로 보통 사람은 한 번들(묶음 단위) 정도 나오는데 안젤리카 머리카락은 늘 두 번들이 나왔다. 어린이 가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4번들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한 사람의 암환자를 위해 보통 사람 열네 명이 3년이나 4년 머리카락을 곱게 길러 도네이션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열네 명은, 3,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하이라이트나 염색, 헤어 커트 등 일체의 여성적 패션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선물인가. 
여성의 멋은 헤어스타일에서 거의 50% 이상이 나온다. 쇼핑몰 치고 미용실 하나 없는 곳은 없다. 오죽하면, 머리카락이 빠진 암환자들을 위한 패션 용품 비즈니스가 성황을 이루고 있겠는가. 각종 패션 가발은 물론, 모자와 스카프에 이르기까지. 내 머리를 잘라 도네이션한다는 것은 희생을 딛고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의 꽃, 진정어린 마음의 선물이다. 

언젠가, 남가주 미스 하이틴에 선발된 여고생이 가게에 왔는데 길게 기른 검은 생머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결 고운 머리카락이 조그만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온갖 법석을 떠는 십대들을 많이 보아 온 터라, 하이라이트 하나 없는 그녀의 생머리가 천연 기념물을 보는 듯 신기했다. 
어쩌면, 이렇게 머리를 예쁘게 잘 길렀느냐고 물었더니, 항암 치료로 머리칼이 다 빠진 할머니 가발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기른다고 했다. 어릴 때 사랑으로 키워준 할머니께 보답하려고 자기 여동생도 같이 기르고 있단다. 이제는 자기들이 받은 사랑을 되돌려 줄 때라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잊었다. 나도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 내가 선물을 받는 듯 가슴이 먹먹해 왔다. 담쟁이 넝쿨처럼 뻗어 나가는 러브 체인. 사랑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잎을 피워 나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거야말로 신명나는 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닌가. 팍팍한 사막 같은 삶에도 어딘가 샘은 숨어 있고 푸른 풀 자라는 오아시스가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있어, 우리도 사막을 가로 지르는 대상처럼 먼 길 마다 않고 떠날 수 있는 거 아닐까. 
오늘, 안젤리카를 통해 다시 한 번 ‘살 만한 세상’을 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머리를 곱게 길러 도네이션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아이들. 그 마음 그대로 곱게 자라길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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