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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답사단 기행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1)
설아빈(시드니대 이공계열학과 1학년) | 승인 2019.09.12 15:02

재호 광복장학회(이사장 황명하)는 2016년 3•1절에 올바른 인성과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들을 지원٠양성할 목적으로 광복회 호주지회의 산하재단으로 설립됐다. 올해는 제4기 광복장학생으로 호주 거주 한인 대학생 3명(UNSW 1학년 문건우, 시드니대 1학년 설아빈, 모나시대 3학년 허정인)을 선발했다. 학생들은 7월 17일~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중국 상해, 항주, 남경, 장사, 광주, 중경 등 10개 도시의 독립운동사적지 현장답사 교육에 참가했다. 3학생의 답사 기행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註)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입구에서 5조 조원들 (왼쪽이 설아빈 학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호주 영주권을 취득하고 나서도 나의 근본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한국말은 호주 사람들보다 잘하는, 영어는 한국 사람보다 잘하는, 한국인과 호주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시드니대에서 한국어 과목을 강의하는 박덕수 교수님이 재호 광복장학회에 대해 알려주며 나를 추천했다. 자기소개서 작성을 위해 장학회에 대해 조사하며, 호주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뜻 깊은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재외동포 자녀들에게 지속적인 교육 활동을 제공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잊지 않고, 뿌리 깊고 단단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게 지원하는 유익한 재단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장학회를 통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원했고, 운이 좋게도 제4기 광복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제15기 독립정신 답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상하이-자싱-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구이린-치장-충칭 총 10개 지역을 답사하는 7박 8일간의 대장정을 기획했다.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건국의 구심점인 임시정부. 그들의 흔적들을 따라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후손들이 보람차고 뜻 깊은 8일간의 대장정을 떠났다. 이 여정을 통해 나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었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이어받아 진정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상하이 민국공묘

2019년 7월 17일, 드디어 대망의 답사 날이 밝았다. 우리 답사단은 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에 같은 색깔의 파란 단복을 입고 모였다. 멀리서 보아도 아, 우리 단원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인사와 눈빛 교환 그리고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이번 답사의 시작점인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의 공기는 뜨거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찜통더위였다. 하지만 우리 답사단의 부푼 마음은 산뜻했다. 첫 방문지인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다. 청사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1층 회의실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과 커다란 태극기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조범래 답사단 부단장의 열정적인 강연이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과 이동 경로에 대해 담백한 사실들을 전해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초의 민주 공화정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부로 3•1 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의해서 8•15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에서 13년 동안 임시정부가 머물렀지만, 우리가 방문한 청사에서 대한민국 국호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한민국 大韓民國’ 국호가 처음 탄생한 자리는 서금2로인데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초로 수립된 정확한 장소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황제의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로 바뀐 결정적 장소. 우리 후손들이 잊지 않고 찾아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유일한 상징으로 남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쓸쓸한 현실을 마주했다.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단체사진

협소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위해서 3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어린 두 아들을 위한 백범일지를 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해 해외에서 노동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편지 쓰기이고 마지막으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결국 김구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성공시킴으로써 세계인을 놀라게 했고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 역사적 현장에 내가 서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화려한 상하이의 건물들을 지나 도착한 곳은 조금 허름해 보였던 건물 영경방이였다. 그곳은 김구 선생 가족들과 임정 요인들이 거주하던 숙소였다. 여기에서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중국인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껍질로 김치를 담그었고,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가 산후조리를 잘 못하다 계단에서 낙상으로 사망한 곳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들까지 희생하며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절박함, 너무나도 열악하고 고단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지금 편하게 살고 있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상하이 홍커우공원 내의 윤봉길 의사 기념관(매헌)

발길을 돌린 곳은 홍커우공원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 사적 전시관(매헌)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23세 되던 해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사건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일본 가나자와 교외의 형무소로 옮겨져 장렬히 순국,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나는 그가 실제로 던진 물통 폭탄과 자결용으로 가지고 있었던 도시락 폭탄을 보았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것들을 몰래 품에 지니고 있다가 일제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을 그 당시 이곳의 윤봉길 의사를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중국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읽었을 때 얼마나 조국을 부모보다 형제보다 처자보다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의 확고한 신념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매헌에서 관람했던 영상물 중, 의거 당일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과 회중시계를 맞바꾸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데가 없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의 유품인 그 시계를 실제로 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의거 당일 마지막으로 김구 선생과 시계를 맞바꾸고 홍커우공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굳건하고 올곧은 독립투지와 희생정신이 돌덩이로 투척되어 잔잔한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두 번째 날은 상하이에서 마지막 일정인 만국공묘를 방문했다. 만국공묘 내 외국인 묘역에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묘지에는 자세한 이장기록이 없어서 영어로 Kim, Park같이 쓰여있는 묘가 한국인의 묘라고 대략 추정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분이었고, 신규식 선생은 1921년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 총장으로서 쑨원의 광동정부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초기 임시정부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임시정부 내분을 통탄하여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만국공묘에 안장됐다가 1993년 박은식 선생의 유해와 함께 한국으로 봉환되었다. 여기에 아직도 남아있는 독립운동가들도 하루속히 조국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쉬셨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 다음 자싱으로 향해 방문한 김구 선생 피난처 매만가 76호는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가족들은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김구 선생의 현상금은 요즘 시세로 35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미국인 목사 피치 부부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은신하던 김구 선생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협력으로 자싱으로 피신 할 수 있었고 저보성 등 여러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은거 생활을 이어갔다. 김구 선생 피난처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두터운 우의를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1층에는 기념관 그리고 밖으로 보이는 호수(남호)가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이곳은 끝을 알 수 없던 은거 생활 속에서 한 숨 돌릴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 아니었을까? 2층에 있는 침실에는 비밀스러운 탈출 통로를 볼 수 있었다. 왼쪽 구석에 나무 바닥을 뜯어 만든 비상구로, 일제가 들이닥쳤을 때 그 통로를 통해 바로 배를 타고 탈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임시정부요인 거주지 일휘교 17호를 방문했다. 복원된 생활공간에 우리 단원 2-3명만 들어가도 좁고 답답함을 느꼈는데,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들과 뒤에서 묵묵히 받침대 역활을 한 임정 가족들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내 김구 선생 집무실

우리는 항저우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이동했다. 임시정부는 여기에서 약 3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항저우 임정 청사는 중국 국무원에 의해서 ‘국가급 항일전쟁 기념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항저우에서 국가급으로 지정된 곳은 한국 임정 청사가 유일하다고 들었다. 2층 건물인 기념관을 관람하고, 조범래 부단장의 강연을 들었다. 그 내용은 1930년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과 분열에 관한 것,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분열과 재통합, 조선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가 겪었던 고초였다. 나에겐 조금 어렵고 헷갈리는 내용이었지만, 우리 조의 강수종 조장이 다시 설명해줘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후 임정 가족들이 거주했던 오복리 2호를 들렸는데,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정집이어서 외관만 살펴본 뒤, 한국독립당 사무소터 사흠방으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청태 제 2여사였는데 당시 화려한 식당을 갖춘 지방 최고의 여관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호텔로 사용하고 있어서 단원 전체가 들어갈 수는 없었고 일부만 관람해서 아쉬웠다. 항저우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고속열차를 타고 난징으로 향했다. 덥고 고단한 하루였지만 독립운동가들의 노고에 어찌 비할 수 있을까? 

설아빈(시드니대 이공계열학과 1학년)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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