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드니 인구는 날로 늘어난다. 2016년에는 4,609,642명이었는데, 2021년에는 5,029,782명이 된다. 그동안 뉴잉턴과 켈리빌, 그리고 로즈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2026년에는 5,458,272명이 되는데, 주로 시드니 제2공항 근처. 2031년까지는 5,878,238명이 될 것인데, 주로 켈리빌과 홈부시,그리고 파라마타 옆의 카멜리아가 인구 집중 지역이 된다. SMH(시드니모닝헤럴드) 신문에서 인용한 통계니까 믿는다. 10년 내 1백30만 명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사도 믿는다. 현 시드니 상황을 보면 좀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구절벽이 확실한 조국의 위기를 생각하면 즐거운 비명이다. 그만큼 시드니가 좋다는 의미이고, 또 모이다 보면 이럭저럭 살길이 열린다. 뉴욕이나 런던처럼. 

2. 
반면에 조국은 좀 어려워 보인다. 인구절벽은 머나먼 미래라 생각하는지, 현실 바닥에서 이전투구하고 있다. 이번에 강행한 법무부 장관 임명 사태로 작은 루비콘강을 넘어갔다. 시이저가 이겨서 황제가 될지, 아니면 원로원이 이겨서 공화정을 유지할지는 모른다.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니다. 각자 소신대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역사 나름대로 결말을 짓는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더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소망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3. 
조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이 지난 1달 동안의 신문 지면들을 빼곡히 채워 줬다. 유튜버들도 심각하게 혹은 즐거워하면서 신나게 영상을 올렸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 때문에 먹고 살고, 조금씩 즐긴다. 세상에 정치싸움만큼 전율과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가 없다. 그렇다고 그 일들을 가볍게 보자는 말은 아니다. 각자 삶의 현장이 다르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우의 대립에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조국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날을 잠시 살펴본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교 수업의 일부로 목총을 들고 교련 수업을 들었다. 대학1, 2학년 때에는 데모에 참여했다. 뭘 알고서 한 일이 아니다. 수업은 연기되었고, 누군가 모이라고 해서 급조된 군중 속에 있었다. 밀려서 교문 밖으로 나갔고, 한 50m 전진했다가 최루탄 가스에 밀려서 되돌아왔다. 정문이 아니라 뒷문에서였다. 3학년 봄이 되니 탱크로 무장한 군대가 대운동장으로 밀고 들어와 야영 천막을 쳤고, 교문은 잠겨졌다. 
개학하자 마자 다시 임시 방학을 맞은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갔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침 구보 후, 정확하게 2mm만큼만 치약을 짜서 이빨을 닦았다. 특별한 저장법으로 간수했던 고구마로 밥을 먹으며, 군인으로서의 농민, 그리고 부모님과 하나님에 대한 효도를 배웠다. 다양한 사회계층 사람들이 동기생이었는데, 스님도 있었다. 제일 젊다는 내가 동기회 총무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런 일에 몰입할 의식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졸업하고 간 군대에서는 그때 바로 시작된 얼차려 훈련 때문에, 구타를 당하지 않았다. 단지 개가 되려는 고참 상병과 제대를 앞둔 병장에게 세차게 세 번 뺨따귀를 얻어맞았을 뿐이다. 
제대하고는 바로 취직시험을 봤다. 70학번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내 이름만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제대와 취직시험 사이에 12만 원 수강료를 주고 공부하여 딴 품질관리사 자격증이 힘을 발휘한 것 같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매일 세종로로 출근했다. 야근하며 야식 맛을 들여갔다. 그러던 중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났다. 그 다음날 온 세계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들었고, 바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명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이상한 법 아래서, 친구들과 저녁밥을 먹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광기 어린 몇 개월이 지난 후 1980년 5월 15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였다. 군부독재에 맞서는 조직적인 항거였지만 역부족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골목길로 도망하며 흩어지는 광경을 나는 내 직장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국의 앞날에 대해 많은 걱정이 있었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 역시 그들의 구호대로 이뤄지는 세상을 볼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잡혀갔고, 지하로 잠적했으며, 노동현장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면서, 내가 다니던 직장은 정권의 철퇴를 맞고 공중 분해되었다. 그때 내 나이 31살. 봉급쟁이 생활에 미련을 버리고, 받은 퇴직금으로 호주와 유럽, 대만과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결혼한 후, 1988년 호주에 정착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났고, 요즘의 뒤숭숭한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난 양심고백을 한다. “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조국에서 두 편으로 갈려 좌충우돌하는 그들을 행해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난 그동안 그 역사적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도 입이 있으니 한마디 한다면 이것이다. “너무 피 터지게 싸우진 마세요. 다 한편이에요!”

4.
옆집에 개 두 마리가 있다. 그 개들이 하는 일은 놀고먹고 뛰는 일이다. 낮에는 그렇게 놀다가, 주인 부부가 퇴근하면 집 안으로 들어가 따뜻하고 편안함 밤을 보낸다. 어느 날인가 밤이 되었는데도 주인이 돌아오질 않았다. 개들은 검은 밤을 향해 마구 짖어 댔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다. 백차가 길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빼꼼히 문을 열고 동정을 살펴보는 나를 향해 경찰이 걸어왔다. 질문을 받았다. 옆집 사람을 아느냐고? 뭔가 수상쩍은 점이 있느냐고? 아니라고 했다. 괜히 이웃 사람에게 안 좋은 말을 하기 싫었다. 경찰은 가지만, 옆집 하고는 함께 오래 살아야 하니까. 경찰은 그런 내 말을 참조하고는, 밖에서만 좀 더 살펴 보다가 그냥 갔다. 나중 한밤중이 되어서야 개 짖는 소리가 멎었다.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날 보니 주인은 뒤뜰에서 휘파람 불며 나무 가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위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잘 되었네. 아무 일도 아니었네. 개 짖는 소리가 좀 시끄럽고, 주말마다 전동공구 소리가 좀 나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지." 그렇게 옆집 주인은 가끔 나타난다. 대신 개들은 언제나 거기서 소란을 피운다. 힘이 넘치는 젊은 두 개는 서로 싸우듯이 레슬링을 한다. 푹신하라고 깔아준 이불을 물고 뜯어 온 사방에 솜을 헤쳐 놓는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우리 집 지붕을 쪼아 대는 까마귀를 쳐다보며 또 짖는다. 그래서 옆집 마당은 아주 어지럽고 시끄러운 개판이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쯤 주인이 정리해준다. 초록색, 빨간색 쓰레기통을 갖다 놓고, 개들이 어질러 놓은 쓰레기와, 무성하게 자라난 잔디를 정리해준다. 그 일을 하면서 개들에게는 전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개는 그저 개가 할 일을 하고, 주인은 그저 주인이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 옆집 개와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존중의 케미가 있다.

5. 
며칠 전 '골든레이'란 배가 현대자동차를 싣고 가다가 미국 조지아주 해변에서 뒤집혔다. 승무원 모두가 구조되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구조된 선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관실 파이프 위에 앉아 있었다. 65.5도까지 치솟는 열기와 싸우며 구조를 기다렸다. 물은 점점 가슴 높이 차 올라와 겨우 숨 쉬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이 처한 상상 가능한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라고 구조대는 묘사했다. 나 같으면 벌써 심장과 뇌가 터져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이다. 그런데 그는 살아났다. 저쪽에 갇혀 있던 동료 3명의, 그리고 그 세 사람이 먼저 구출된 후에는 밖의 구조대가 선체를 두들기는 소리 때문이었다. 탕탕탕 … 탕탕탕. 구출된 후에 그가 말한다. “나는 속에 갇혀서 가만히 밤을 새웠지만, 구조대는 파이프를 자르고, 없던 길을 만들며, 나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습니다. 강도가 다릅니다.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6.
나도 그 소리를 낸다. 탕탕탕 … 탕탕탕.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당신의 조국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 우리가 당신에게 갈 때까지 절대 죽지 말고 살아 계세요.”. 그렇다. 나는 조국 민주화에 뭐 하나 제대로 이바지한 것 없다. 그렇다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희망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내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마저 손 떼고 있지는 않으시다. 나는 다만 내게 주어진 삶을 정직하게 살아낼 뿐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못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회복의 소망을 전하며 살 뿐이다. 당신 역시 그렇게 살기 바란다. 우리가 못 간 길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않은 것에 안타까워하자. 내 키가 작은데, 188cm의 조인성을 부러워한다고 뭐가 되겠는가? 아이큐 160이라는 신동엽을 부러워해서 뭐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다 태어난 한계 속에서 산다. 그 한계 때문에 지금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그릇 크기를 알고, 그 잔을 깨끗한 물로 채우며 살면 된다. 그다음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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