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외곽 깊은 숲속에 있는 천녕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재호 광복장학회(이사장 황명하)는 2016년 3•1절에 올바른 인성과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들을 지원٠양성할 목적으로 광복회 호주지회의 산하재단으로 설립됐다. 올해는 제4기 광복장학생으로 호주 거주 한인 대학생 3명(UNSW 1학년 문건우, 시드니대 1학년 설아빈, 모나시대 3학년 허정인)을 선발했다. 학생들은 7월 17일~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중국 상해, 항주, 남경, 장사, 광주, 중경 등 10개 도시의 독립운동사적지 현장답사 교육에 참가했다. 3학생의 답사 기행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註) 

세 번째 날은 난징에서의 일정이었다. 처음 간 곳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천녕사)였다. 산 비탈길을 올라가던 버스가 갑자기 정차하여 우리를 하차시켰다. 그 어디에도 기념할 만한 건물이나 장소는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단원들을 따라서 풀밭이 무성한 어느 야산의 산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포장되지 않은 산비탈을 힘겹게 올라가니 그 끝에는 폐허로 남은 천녕사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사적지와 사뭇 달라 놀랐고 이 정도로 외면 받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거의 쓰러져 간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을씨년스럽고 초라했다. 1970년 문화대혁명 당시 불에 타거나 부서져 사라졌기 때문에 이런 모습만 남아 있었다. 이곳은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끈 의열단 훈련지로 3기생 44명을 포함 125명의 청년 투사들을 양성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기반이 되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다닌 금릉대학(현 난징대학)이었는데 김원봉 선생이 민족혁명당을 창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 안을 거닐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와 같은 대학생들이 독립투쟁을 했다는 사실과 그들의 확고한 독립 투지에 경이로움을. 

그 뒤로 답사한 이제항위안소기념관에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만삭위안부’ 사진으로 잘 알려진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고초를 겪었던 곳으로 성 노예로 전락해버린 여성들의 슬픔과 분노를 느낄 수가 있었다. 진열관 2층에 세워진 위안부 추모 부조물 ‘멈추지 않는 눈물’에서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도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눈물을 닦아 드리면서 그녀들이 고된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떨쳐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본 전쟁의 비극과 참혹함에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40일 간에 희생된 30여만 명의 난징 시민들.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일본이 벌인 끔찍한 만행과 전쟁의 참상, 그리고 끝없이 쓰여 있었던 희생자 명단에 기겁하고 말았다. 전시관 관람 내내 조용히 두 눈을 껌뻑이며 하나하나 기억하려 애썼다. 전시관 끝엔 history is history, and facts are facts. 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결론이 벽에 적혀 있었다. 그렇다. 역사는 역사고 사실은 사실이다. 아픈 역사를 이해하고 기억하여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아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김원봉, 김마리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닌 난징 금름대학에서 호주 단원 설아빈, 문건우, 허정인 학생

네 번째 날이 밝았다. 우리는 창사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거주지이자 조선혁명당 본부로 사용되었던 남목청 6호를 방문했다. 1938년 5월에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을 위한 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회의 도중 갑자기 뛰어든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한의 저격으로 김구 선생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으며 유동열, 지청천 선생은 부상을 입었고, 현익철 선생은 암살되었다. 이른바 ‘남목청 사건’으로 김구 선생 등은 인근 상아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김구 선생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어 병원 문간에서 명이 다할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외부만 살펴보았던 상아의원은 지금도 창사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김구 선생이 실려 온 당시 한커우에서 중일전쟁 중이던 장제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치료를 받으며 우의를 확인했다고 전한다. 같은 민족에 의해서 총을 맞은 김구 선생은 다른 민족인 중국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났는데 그 통탄한 심정은 어떠셨을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고, 역사를 바로 알고 더욱 더 나아가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유자명 선생의 흉상과 옛집이 있는 호남농업대학을 찾아갔다. 그는 한국과 북한에서도 독립운동가로서 존경 받고, 중국에서는 저명한 농업학자로 칭송 받는 분이었다.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기념관에서 호주 단원 왼쪽부터 설아빈, 문건우, 허정인 학생

다섯 번째 날은 광저우에서 황포군관학교, 동정진망열사묘, 월수공원,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터,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사무소터를 방문했다.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1924년에 쑨원이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설립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이 장제스 등 국민당 요인들과 담판을 벌인 뒤 한국 젊은이들을 이 학교에 입교시켰다. 김원봉 선생을 비롯해 이곳에서 확인된 한국인만 73명, 분교 학생들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었다. 그들은 졸업 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통해 군사간부 양성에 힘쓰는 한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적 기초를 닦으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오로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잊지 않고 그분들의 뜻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터는 2015년 새로 확인된 곳으로, 현재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다 일본군을 피해 다시 이주했다고 한다. 

류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진열관 앞에서 단체사진

여섯 번째 날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추억을 많이 만든 날이었다. 우리 단원들은 광저우에서 류저우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12시간 정도 이동했는데, 마치 설국열차를 연상케 하는, 칸마다 3층 침대가 6개 구조로 되어있는 매우 좁고 열악한 열차였다. 그래도 우리 조는 옹기종기 모여서 게임도 하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도 나누며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기차는 류저우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진열관을 방문했는데 아쉽게도 내부공사로 인해서 관람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독립군가도 불렀는데, 지나가던 중국 행인들이 우리를 촬영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독립 의지를 담은 독립군가를 끝까지 부르고 나니 뿌듯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기억한 대한민국인 ㅡ> 삭제 요망 우리 단원들이 자랑스러웠다. 그 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구이린에 도착해 조선의용대 활동지였던 칠성공원을 방문했다. 

일곱 번째 날은 치장과 충칭에서의 일정이었는데 사실상 마지막 사적지 답사 날이었다. 치장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임시정부터 상승가였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커다란 병원이 지어져 있었고, 주차장과 골목 계단 뿐이었다. 씁쓸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인채로 치장 임시정부 시절에 주석으로 활동하고 이곳에서 서거한 석오 이동녕 선생 거주지로 이동했다. 타만강변의 큰 빌딩 두 채 사이로, 풀밭 위에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사는 가정집이었다. 주인이 높은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건물을 매입해 보존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역사의 흔적이 이렇게 취급되고 있다는 현실이 애달팠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충칭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임정이 먼저 충칭으로 옮겨온 뒤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자금을 원조 받아 요인 가족들이 후발대로 이주하여 토쿄한인촌을 만들었다. 이곳에 세워져 있던 기념비는 조선인들이 몰래 만들어 놨던 것인데, 재개발 때문에 우리는 흙탕물 가득한 강 건너 수풀 사이에서 먼발치에 있던 비석만 볼 수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사적인 현장이 앞으로 잘 보존되어 후대의 후손들도 방문해 그 의미를 되새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디.

치장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석오 이동녕 선생 주거지

그 다음으로 간 곳은 1945년 9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환국 직전에 마오쩌둥을 만났다는 계원과 올해 복원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이었다. 내부의 진열관에서 강의가 이어졌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했다. 1940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발표한 한국광복군 선언문에는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이 재정원조를 하는 대가로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통해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였고, 임시정부와 마찰이 있었다. 오랜 기간 협상 끝에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으며, 재정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등의 주요 내용을 담은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했다. 김구 주석과 미국의 OSS책임자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해 계획은 무산되었고 김구 주석이 탄식한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역사진열관에서 설아빈 학생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의 마지막 종착지. 충칭 임시정부청사 연화지에 도착했다. 1940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충칭으로 옮겨왔고, 석판가, 양류가, 오사야항, 연화지 등 네 개의 청사를 이용했다. 그중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인 연화지에서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이 환국 당시까지 사용했던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것은 가파른 계단. 이곳이 1945년 11월 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해맑게 웃으며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27년의 세월 동안 이동했던 임시정부는 일제를 피해 가며 중국 대륙의 초라한 어느 주택가, 골목, 산기슭, 강가에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갔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그분들의 숭고한 업적을 기억하며 이어가야 할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독립운동가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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