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독립운동사적지(10개 도시) 기행문 연재
재호 광복장학회(이사장 황명하)는 2016년 3•1절에 올바른 인성과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들을 지원٠양성할 목적으로 광복회 호주지회의 산하재단으로 설립됐다. 올해는 제4기 광복장학생으로 호주 거주 한인 대학생 3명(UNSW 1학년 문건우, 시드니대 1학년 설아빈, 모나시대 3학년 허정인)을 선발했다. 학생들은 7월 17일~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중국 상해, 항주, 남경, 장사, 광주, 중경 등 10개 도시의 독립운동사적지 현장답사 교육에 참가했다. 3학생의 답사 기행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註)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표지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사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신 말씀이다. 이는 부모님께서 항상 내게 해주시던 말씀이기도 하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가르침은 한국의 역사에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갖는데 영향을 주었다.  나는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를 읽으면서 일제강점기와 민족분단의 뼈아픈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자각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제15기 독립정신답사단>에 재호광복장학회를 통해 지원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2019년은 자주독립의 근간과 실체인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다. 제15기 독립정신답사단에서는 임시정부의 발자취와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고자, 애국선열들이 이동한 4,000㎞에 달하는 독립운동 순례 길에 올랐다. 50여명의 학생 답사단은 한마음이 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상해, 가흥, 항주,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계림, 기강, 중경 등 중국의 10개 도시를 답사했다.

상해 홍구공원 내 윤봉길 의사 유적관 매헌 앞, 오른쪽에서 2번째가 허정인 학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7월 17일 06시 30분, 독립정신답사단의 첫 일정이 시작되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하자 화창한 날씨가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까지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상해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독립투사들의 애환과 애국정신이 서린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한 곳 임에도, 상해 도심의 뒷골목에 낡고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3층짜리 빨간 벽돌건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정부청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과 달리 작고 초라한 모습에, 주권을 상실했던 조국의 비애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1989년 상해의 도시개발계획으로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청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국가 차원에서 전문적인 관리와 보존이 이뤄져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증언하는 것은 국권침탈의 역사를 기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영욕의 현장을 영원한 민족의 교훈으로’ 삼는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윤봉길 의사 ‘장부출가 생불환’ 홍구공원 
다음 답사지인 홍구공원은 ‘장부출가 생불환’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난 윤봉길 의사의 독립의지와 장렬한 상해의거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87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두고 홍구공원의 길을 걸으면서, 1932년 4월 29일을 떠올렸고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어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려야 한다.’ 라는 윤 의사의 말이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일본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 승리축하기념식에서 일본 제국주의 심장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윤 의사의 독립의지와 숭고한 희생에 대해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윤봉길 의사의 유적관인 매헌에 들어서자 그의 업적이 적혀있는 기념비를 볼 수 있었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순국한 청년 윤봉길의 숭고한 정신을 각자의 가슴에 새겼다. ‘과연 나도 잔혹한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던져보며, 나약하기만 한 내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윤봉길 의사는 4월 26일 김구 선생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친 윤 의사와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평화롭고 아름다운 홍구공원의 자태와 상반되게 나의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상해 황포탄 의거지(외탄공원)에서 3조 조원들, 앞줄 왼족이 허정인 학생

황포탄 의거지(외탄공원)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황포탄 의거지(외탄공원)로 이동하여 답사를 했다. 이곳은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선생이 1922년 3월 28일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귀환 도중 상해에 도착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했던 의거 현장이다. 오성륜 선생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는데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였고,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외탄공원은 야경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었고, 한국인 관광객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 이러한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몇명이나 될까? 이곳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어떠한 자료나 비석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역사적 흔적과 자료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다. 독립운동의 유적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작은 흔적 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기념관에서 임정요인 가족과 함께한 허정인, 문건우 학생

김구 선생의 피난처와 임시정부요인 거주지
가흥에 있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와 임시정부요인 거주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가장 슬펐던 점은 김구 선생의 피난처에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이용할 수 있게 항상 나룻배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김구 선생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그 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맛있는 식사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나는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선조들의 노력에는 부족하겠지만 최소한 그분들의 희생과 노력을 잊지 않고, 그분들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우리는 남경시 외곽의 천녕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이동했다. 이 학교는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었으며, 정신, 정치 및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한인들이 군사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학교를 폐쇄했다고 한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인지 학교를 찾아 올라가는 산길이 매우 험난했다. 현재 사람이 오고 간 발자국들이 모여 길이 조금 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하기 힘들었다. 그 당시에 학교를 찾아 올라가는 길은 얼마나 험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창설한 김원봉 선생에게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느꼈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의 'Family ruined' 동상

금릉대학, 남경대학살기념관 그리고 이제항위안소기념관
금릉대학(현 남경대학)은 여운형, 김원봉, 김약수, 김마리아 등 한국독립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닌 대학으로 1935년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그리고 의열단이 모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한 장소이다. 금릉대학을 둘러보고,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비극의 역사와 남경대학살을 고발하는 기념관이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 범죄로, 중국 측 통계에 따르면 40일 사이에 30만 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뉘는데, 강동문 학살지에서 발견된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실, 일본군 만행 전시실과 일본 군국주의 침략사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엔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놀랐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처참했던 학살에 관한 증거 자료의 양과 전시장 규모가 엄청나서 놀랐다. 그리고 통곡의 벽, 생존자들의 발자국 부조 등이 있던 야외 기념관까지 둘러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아팠던 역사를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고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전시장도 눈에 띄었는데 이는 남경대학살 당시 6주 동안 12초에 한 명 꼴로 희생자들이 죽어 나갔음을 의미한다. 전시관 끝에 ‘历史可以宽恕 但 不可 以 忘却. 前事不忘 后是之師’ 즉,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오전에 둘러보았던 천녕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폐허로 남아있던 것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고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경 이제항위안소기념관 조형물 앞에서 단체사진

우리는 이제항위안소기념관으로 이동했다. 1937년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이후 위안소를 운영한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면 방 위 다락방에 올려두고 내려올 수 없게 사다리를 치워버려 굶게 하는 등의 고문을 일삼았다고 하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바닥에 드리운 잔잔한 햇빛이 아이러니했다. 가슴 아픈 역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마주하며, 이런 역사가 절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은 박영심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들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조범래 부단장의 강의 중 “답사에 참여한 우리는 독립군가의 주인공처럼 더 큰 희망으로 기억되고 우리 후손들에게 그 기억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아직 진행 중이다. 따라서 우리는 씨앗이 되어 울창한 숲을 가꾸어 나가야 하며 이 더운 여름날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물려줘야 한다.” 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호주에 돌아가서도 나의 답사 기억을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남경 이제항위안소기념관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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