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는 분으로 부터 세살난 푸들 한마리를 얻었다. 딸이 출산을 앞두고 개를 돌보기 힘들고 곧 태어 날 갓난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다면서 딸을 대신해 주위에 물색을 하다가 우리집이 낙점되었다. 우리 집엔 늘 두 마리 개가 집에 있었는데 ‘찡코’가 사고로 죽고 왠지 혼자 측은해 보여 한 마리를 더 구해야 하나 생각하곤 했는데, 얼굴이 주글주글하고 코가 납작한 수컷 불독 ‘장군’이에게  모처럼의 동성 친구가 생긴 셈이다. 새로온 개는 흰색 털이 복실복실 하고 체구가 작지만 다리가 길어 다리가 짧고 몸통이 두터운 장군이와는 보자마자 늘씬한 몸매로 대조를 이룬다. 집에 오자 전에 부르던 이름이 부르기 어려워, 우리는 곧 개의 이름을 ‘호두’ 로 부르기로 했다. 

코가 호두처럼 동글고 쫑끗하게 생기기도 했고,  히브리어로는 ‘감사’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별 이견없이 쉽게 작명 합의가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개명이 된 ‘호두’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새 집에, 새 주인, 새 이름으로 완전 새 인생(? 견생)이 시작되었다. ‘호두’는 새 집에 왔는데도 어색해 하지 않고 마당 구석구석 몇 군데 오줌을 싸 놓더니, 나에게 다가와 냄새를 맡고 먼 발치에 엎드려 눈치 채지 않도록 이쪽저쪽을 살핀다. ‘장군’이가 무턱대고 돌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주인에게 애정 공세를 하던 것과 달리 호두는 자신의 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으려는 새침한 의도가 보인다.  나도 새 식구에게 좀 친절을 베풀고 친해져야 겠다 싶어 손을 내밀고 등을 쓰다듬자 서로 적응하고 잘 살아보자는 실존의 문제 때문인지 그다지 뻐티지 않고 마음을 내주기기로 작정한 듯 피하려 하지 않는 눈치이다. 막강 권력의 새로운 주인에게, 새침해 하며 등장한 ‘호두’는 생긴 것도 행동도 성격도 다른 모습으로 호기심을 키운다. 아직 마음을 다 알수는 없어도 분명 ‘호두’는 날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상대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무모한 믿음이 있다. 단지 주인이라는 특수권력을 담보한 착각의 뻔뻔함이 배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두달여 동안 한국의 신문에는 어느 서울 대학 법대 교수 출신을 대통령이 임명권자로서 법무장관으로 지명하고 나누어진 국론으로 나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낱낱이 실었다.  아직도 그 후유증은 가시질 않았고 틈이 날 때 마다 크고 작은 집회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대한민국을 멀리서 바라보는 이민자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깝다. 자신의 임기가 지난 후에 남북 공동의 올림픽을 열자는 설레는 국가 어젠다를 대통령이 선포하지만 얼마 전 손흥민을 비롯한 유럽의 기라성 같은 프로 선수들이 월드컵 예선을 치르느라 북한을 다녀오며 무관중, 무중계로 반응한 북한의 대답은 대통령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든다. 설렘이 아니라 헛물켜는 착각이 아닌가 그저 의구심이 생긴다. 미국과의 동맹도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국방과 안보와 경제도 모든 것에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통령의 실적은 그의 자신감있는 연설속에서 괴리감이 깊어진다. 어느 신문은 ‘어느것 하나라도 잘한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아마 많은 국민이 그것에 공감 하지 않을까?  마치 내가 호두를 대하는 것 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호두 대하 듯 하지 않나 의문이 간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막연한 꿈같은 피리 소리에 국민이 더 이상 함께 덩실 춤을 춰 줄 수 없다는 몸짓을  그는 이해 하고  있을까? 국민이 막연히 주인만 바라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아픈 몸짓을..

아무런 권한이 주어진 것 같지 않은 애완동물에게도 새침한 성격이 용납되고, 갖고 태어난 귀여운 용모는 주위의 관심을 끌고, 주인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의 궤도로 진입하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을 대하며 새로운 삶의 기대를 키운다.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나름의 매력과 가치를 인정 받으며 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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