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단국대 미주문학아카데미 수강자들과 함께(하단 맨오른쪽이 최경희 작가)

-최경희 수필 「아주까리와 진둥개」

나는 단국대학교 국제문예창작센터의 ‘한국문학 세계화’의 일환으로 동료 교수문인과 함께 2014년부터 해마다 여름과 겨울 미국의 LA를 방문해 ‘미주문학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이 강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강한 유일한 사람, 최경희 작가는 1932년생 여성 문필가다. 1981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1991년부터 1996년에 걸쳐 미국의 이민문단과 한국의 문단에 시와 시조로 등단한 이후 미주문인협회의 계간문예지인 󰡔미주문학󰡕과 일간지 󰡔미주중앙일보󰡕 등에 여러 장르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아직 작품집 한 권 없다. “죽기 전에 한 권을 내서 손주들에게 남기도 싶다”는 꿈을 밝혀온 지 꽤 됐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내 잘못도 있다. 첫 강좌를 마칠 때 나의 과감한 작품평에 6개월 뒤 “좋지 않은 작품으로 작품집을 낼 수 없으니 다시 공부하고 다시 써서 내고 싶다”고 내게 말해왔다. 

나는 이후에도 그가 보여준 시와 시조와 수필과 소설을 읽었다. 사실 그 수준은 내게 그냥 ‘혹평’당할 수준이라 할 수 없었다. 상대평가로만 한다면 그 지역 그 연배의 등단 문인 누구에게도 뒤질 게 없었다. 주 장르인 시나 시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수필과 엽편소설도 괜찮았고 재미있기까지 했는데, 아쉽고 또한 놀랍게도 그것들은 30년 전에 쓰고 발표한 것이었다. 나는 말하곤 했다. 그는 컴퓨터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다. 당연히 이메일 소통도 안 된다. 운전도 못한다. 그런데도 시나 시조는 아직도 쓰고 있고, 게다가 일본 단가(短歌)를 오래 배워왔고 창작도 하고 있다. 내가 섣불렀던 게 틀림없다. 작품집을 낸다고 할 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출간에 편의를 봐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그는 이미 작품집 한권을 남긴 이민문학가가 되어 있을 것을.

LA에 갈 때마다 나는 그에게 책 낼 원고가 어느 정도 돼 가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시나 시조는 새로 쓴 것이 있어서 내놓는다. 이전부터 써오고 있던 소설은 거의 진도가 안 나가고 있다고 한다. 수필 발표 때는 새로 쓴 것 없어 예전에 발표한 것을 찾아 가져온다. 그렇게라도 한 편 한 편 다듬어지면 책이 한 권 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재촉한다. “이대로는 안 되니 고치고 다듬겠다”라는데 이제는 고치고 다듬으면서 정리하는 일도 버거운 상태인 게 느껴진다. 그도 속이 타겠지만, 나도 그렇다. 내 이런 책임감은 다만 그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은 ‘글을 남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존재의 증명이라 생각한다. 이민자는 더 말할 것 없다. 이민자의 글이 남겨지지 않으면 이민 자체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경희 생애는 그 개인의 것이지만 동시에 일제 강점기-전쟁기-산업화 시기-미국 이민 등으로 이어져 온 한국인 이민세대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까리와 진둥개」는 여고 때 서로 닮은 데가 있어 각각 ‘아주까리’와 ‘진둥개’라는 별명을 얻은, 그 친구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는 수필이다. 어린 시절이나 옛 친구를 다룰 때 그리움, 우정 등으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이 수필은 ‘언니로 군림한 친구’와 ‘그 친구의 보호를 받는 위치에 놓인 자신’의 관계를 실감나게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 작가 최경희는 이 글을 언제 써서 어느 지면에 발표한 것인지 확인해 주지 못하고 있다. (박덕규 : 단국대 교수)

2018년 미주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한 '한국과 다언어문학의 밤'에서 미국 현지 시인들과 시 낭송회를 마치고.(오른쪽 5번째가 최경희 작가)

아주까리와 진둥개

  새벽 산책길에 지나다니는 그 집 울안엔, 고목이 되어 지붕 위까지 사통팔달로 가지를 거침없이 펴 올린 늙은 아주까리 나무가 서 있다. 그 마당 안은 언제나 조용했다.
  오늘 새벽엔 그 나무 그늘에 이전엔 못 보던 몸집이 크고 누르스름한 개 세 마리가 누워 있다가, 느닷없이 입을 모아 신경질적으로 사납게 짖어대며 길가 쪽 나를 향해 몰려오질 않은가.
  평정했던 아침 마음이 흠칫 놀라 금세 헝클어진다. 이내 싸악 불쾌감으로 바뀐다. 
  개 같은 놈들! 내가 어쨌기에!
  눈알이 튀어나오게 노려본다. 더욱 더 포효한다. 대결해봐야 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곧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개 취급해 버리고서 재빨리 그곳을 지나치려는데, 순간 번쩍 무언가 내 머리께에 스쳐 지나가는 게 있다. 
  아주까리와 진둥개!
  늙은 아주까리 나무 그늘에서 예기치 않게 해후한 견족들의 횡포가 충격요법이 되어 찰나에 되살아난 이 낱말들! 반세기 만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우리 둘에게 이 별명을 명명한 분은 여고시절 교장 선생님이시다. 여름철엔 하얀 모시고의 적삼에 시원스레 헐렁한 두루마기를 사뿐히 곁들여 입고, 콧등이 반들거리는 백구두로 차림새를 마무리한 선비셨지. 훤칠한 이마 저 너머 정수리께부터 성성히 뒤로 넘어간 백발은 언제나 가지런히 단정했다. 하얀 붓끝이 날렵하게 끝을 치켜올린 듯한 여덟 팔자형 카이젤 수염 양끝을 틈만 있으면 양 엄지와 검지로 솜씨 있게 말아 올리던 버릇도 갖고 계셨지.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탐지한 우리도 “white cat”이라 은유해, 영광스런 별명을 내려주신 보은(?)으로 서양식 애칭을 정중히 봉송해 드렸다. 물론 우리들 영역 안에서만 통용되었다. 말긋말긋한 모시 의상의 정갈함과 카이젤 수염을 가지신 선생님의 용자에 썩 걸맞은 거라 우리는 자부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서로 닮고 있는 것들을 ‘아주까리와 진둥개 같다’라고 한다. ‘아주까리’는 피마자라고도 하는 풀인데 들판이나 시골 길가 등에 자생하는 일년초다. 그 열매로 짠 기름이 아주까리 기름이다.
 ‘진둥개’는 진드기의 우리 고장 사투리로 개, 말, 소 따위에 빌붙어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에다. 어릴 때 우리 집 개 옆구리에나 등 부위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점으로 까맣게 붙박여 있던 ‘진둥개’를 본 적이 있다. 그 ‘진둥개’와 ‘아주까리 열매’가 그 크기나 모양새가 꼭 닮은 것이다. 
  그와 나는 얼굴 모양새가 닮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런 거였을 게다. 그는 키나 몸집이 나보다 더 컸다. 마치 언니 같았다. 나이도 한 살 위였다. 우리는 참 잘 붙어 다녔다. 아니 그가 나를 이끌고 다녔다. 언니 같은 그에게 끌려 다니는 내가 선생님 보시기엔 개 옆구리에 붙어 다니는 진둥개로 보이셨으리라.
  그는 언니 집 하숙생이었고 나는 기숙사생이었다. 내 도시락은 연중 단일 메뉴다. 그는 색다른 반찬을 항상 내 몫으로 따로 가져와 먹였다. 주말 같은 때는 나를 언니 집에 데려가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했다.
  반에서 그의 자리는 바로 내 뒷자리다. 앞자리에서 수업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예고도 없이 사정도 없이 주먹으로 내 등판을 탕탕 쳐대며 무슨 말이든 걸어온다. 그의 독특한 노크법이다. 어느 땐 그 반동으로 넋 놓고 앉아 있는 내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아프고 화가 나던지 끝내는 나도 울화통이 터진다. 
  나는 그에게 이끌림을 당하고 살았지만 한편으로 그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게 싫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이런 우리들의 관계는 서로의 결핍된 정서 충족을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는 막내여서 언니가 되고 싶어 내게 동생 다스리기 연습을 했던 것일 거고 나는 맏이라서 보호 감찰을 받을 언니가 필요했던 터였을 것이다. 
  어느 핸가 학예발표회 때 우리는 같이 연극을 했다. 연극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운명」이었다. 그는 주인공 베토벤이었고 나는 엑스트라, 그의 친구였다. 그는 주인공에 뽑힐 만했다. 우선 체구나 용모가 나보다 선이 굵어 무대에 서면 돋보일 수 있었다. 목소리가 굵고 허스키다. 물론 베토벤이 허스키였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극중 주인공은 피아노 연주를 해야 하는데 그는 나보다 피아노를 더 잘했다.
  연습 때도 그는 대사를 잘 외우고 역할을 잘 해냈다. 나는 암기력도 없는 데다 게을러서 대사를 미처 외우지 못했다. 그날은 마침 대본 없이 연습하는 날이었었다. 급한 김에 얼추 몇 번 외워본 대사를 읊조리며 지시된 방향으로 향해 걷다가 그만 대사가 아리송해졌다. 하는 수 없이 출발점인 둥근 탁자로 되돌아와 그 위에 놓인 대본을 들여다본 후 다시 출발했다. 몇 발 더 가다 다시 막힌다. 다시 대본으로.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던 그때 창틀에 걸터앉아 지켜보던 선생님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며 창틀에서 내려온다. 나는 그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서 정신이 들었다. 나는 대본에 없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탁자 주위를 뱅글뱅글 물방개처럼 맴돌고 있었다.
  몇 해 전 한국에 갔을 때 그가 사는 둥지에도 들렸다. 늙은 아주까리 고목이 된 그가 그 그늘에 이제는 손주 진둥개들을 거느리고 억척스레 먹이고 재우고 또 여전히 치기도 하며 살고 있었다. 
  지난해 어느 밤 늦은 시각에 그한테서 국제전화가 왔다. 보고 싶으니 꼭 다녀가란다. 항공료를 줄 테니 빨리 오란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를 한 번도 찾아 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그를 찾아 다녔다.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지리적으로나 엄연히 그의 인력권 밖에 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는 내 마음속 어딘가에 한 점으로 찍혀 남아 있는 것일까? 찍혀 있는 그 구심점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인력권에서 떠돌고 있는 위성일 것인가? 늙은 아주까리 고목 밑에나 가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최경희 약력
1932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북 김제에서 성장했다. 김제여고를 나와 잠시 교사생활을 했고 군산시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81년 도미. LA에서 정착해 살았다. 1991년부터 수년에 걸쳐 국내외 지면에 시와 시조로 등단했고 이후 󰡔미주중앙일보󰡕 등에 칼럼을 쓰면서 산문쓰기도 병행하게 되었다. 작품집을 준비하다 중단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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