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1년 예정으로 단국대학교 박덕규 교수와 중앙대학교 이승하 교수가 교대로 재외한인문학의 면면을 살펴보는 글을 연재할 것입니다. 연재를 시작하는 이승하 교수는 시를 중심으로, 박덕규 교수는 소설과 수필을 중심으로 쓸 예정입니다. 2017~2019년 한호일보 주최 문예창작교실에서 특강을 했던 두 분 교수의 연재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편집자주).

김아나톨리 작가와. 2016년 9월 경주에서 열린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서.

해외이민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구한말인 1902년 12월에 하와이로 정책이민을 보낸 것이 시초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899년에 북간도로 집단 이주하여 명동촌을 세운 이들이 있었으므로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해가 1863년이므로 해외이민의 역사는 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안수길의 『북간도』, 김영하의 『검은 꽃』, 그리고 최서해의 「탈출기」 등은 우리의 아픈 이민사를 다룬 작품이다. 

‘강제이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였다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스탈린은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을 모두 잠재적 일본 부역자로 간주하여 반란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 1937년부터 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이주를 시켰는데 그 수가 17만 명이 넘었다. 겨울인데 집을 안 주고 허허벌판에 부려놓아 꽁꽁 언 땅을 파 토굴을 만들고 살았다. 살아남은 자의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일컫는데 떠나온 삶의 터전을 그들은 ‘원동(遠東)’이라고 부른다. 

재외동포가 현재 700만 명을 상회한다. 외교통상부 발행 󰡔외교백서󰡕에 그렇게 수치가 나와 있지만 불법체류자들도 있을 테고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한반도가 워낙 비좁으니까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교민의 수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속사정은 아주 복잡하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라는 수난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중국ㆍ일본ㆍ러시아ㆍ중앙아시아 등지로 그렇게 많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필립의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표지.

전후의 가난은 우리에게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게 하였다. 제3공화국 정부는 독일에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외화 벌이를 꾀하였다.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에 호주행 비행기를 탄 사람이 많았고, IMF 때는 미국행 비행기를 탄 사람이 많았다. 교민으로 잡히지 않는 해외입양자의 수는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는데, 50만 명은 넘을 것이다.  

교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문학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문단에서 인정을 받은 이는 소설가 강용흘ㆍ김용익ㆍ김은국ㆍ차학경ㆍ이창래 등 한두 명이 아니다. 시인은 캐시 송이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소설가로는 김학철이, 시인으로는 김철ㆍ박화ㆍ리욱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한글로 씌어져 이해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연변에서는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등의 문예지가 나오고 있다. 

호주 교민 소설가 돈오 김은 호주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몇 개나 받았다. 재일 조선인 소설가 이회성ㆍ이양지ㆍ유리미ㆍ현월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다. 후보에 오른 소설가는 김사량ㆍ김석범ㆍ정승박ㆍ이기성ㆍ김학영 등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소설가 김아나톨리, 박미하일, 시인 강태수ㆍ전동혁ㆍ이스따니슬라브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아나톨리는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몇 번 올랐었다.  

그런데 현지의 주류 문단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이들 외에 모국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교민들이 사실상 많다. 미국 LA를 중심으로 결성된 미주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고 있는 계간 󰡔미주문학󰡕은 1982년에 창간호를 낸 이후 꾸준히 발간, 2019년 여름호가 나왔는데 87호이다. 2022년 가을호가 100호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나오고 있는 문예지는 이외에도 『뉴욕문학』 『시카고문학』 『워싱턴문학』 『한돌문학』 『한솔문학』 『미주시문학』 『미주기독문학』 『미주경희사이버문학』 『미주펜문학』 『한미문단』 등 10종이 넘는다. 이 책에 실린 문학작품은 한글로 쓴 것이기에 미국문학이 아니다. 분명 한국문학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들의 문학을 읽지도 않고 연구도 하지 않는다면? 

생전의 돈오 김 작가.

그래서 국제한인문학회(회장 홍용희)가 만들어져서 재외동포문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문예창작학회에서도 미국ㆍ일본ㆍ호주ㆍ오스트리아에 가서 한인 교민들과 만나 한글로 작품을 쓰고 있는 그들의 작품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고자 애쓰고 있다. 머나먼 이역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작품을 써서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랴. 국제PEN한국본부에서 올해 5회째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경주에서 여는 이유 중 하나가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자랑하려는 것도 있지만 해외에서 한글로 작품을 쓰는 교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려는 것도 있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1975년 베트남 종전 이후 베트남 난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과거의 백호주의를 철회하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덕에 한국인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주로 군수업체에서 근무하던 노동인력이 이민의 물꼬를 튼 것으로 알고 있다. 호주 이민의 역사가 40년이 넘었다는 말인데, 이민자의 수는 지금 15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 

호주에서 시를 쓰는 이들은 윤필립 시인의 이름을, 수필을 쓰는 이들은 이효정 작가의 이름을 자주 거론한다. 윤필립 시인은 1987년에 이민을 가 호주 체험기인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고려원) 같은 책을 내기도 했었지만 시창작반을 만들어 지금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시인을 키워내 선구자의 역할을 헸다. 

『시드니문학』 제9집 표지.

1983년에 이민을 간 이효정 작가는 호주문학협회를 만들어 수필 쪽에서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시드니 수필』을 창간해(후에 『시드니 문학』으로 제호가 바뀜) 지금까지 10호 이상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두 분 덕분에 호주 문학은 걸음마 단계를 마칠 수 있었고 이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2015년에는 ‘시드니 교민작가 7인 합동 출판기념회’도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드니 문학』은 동인지의 성격이 강하다. 아직 범 호주 한인 문단을 아우르는 문예지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한글의 우수성을 우리는 문학을 통해 널리 알려야 한다. 모국어를 잊지 않고 작품을 쓰는 교민들의 혼신의 열정에 나는 큰 박수를 보내는 한편, 우리 문학의 일부인 그분들의 작품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재외동포문학을 연구한 글만 모아서 『집 떠난 이들의 노래』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사해동포, 국적이 달라도 한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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